지난 10년간 과학계에서는 그래핀과 더불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다강체 연구다. 응집물리분야에서 널리 주목받고 있는 다강체는 전기적 성질과 자기적 성질이 한 물질에 서로 결합돼 전기장으로 자화 혹은 자기장으로 전기분극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물질이다.
다강체가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이유는 그 특유의 성질 때문이다. 한 물질 안에서 전기와 자기적 성질이 강하게 결합돼 있는 만큼 전기장으로 자화를, 자기장으로 전기분극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성질에 의한다면 초저전력, 고효율 메모리 소자 등 많은 자성 소자에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상온에서 자기장으로 전기분극이 조절되는 다강체는 여러 종류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응용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전기장으로 물질의 자화도를 제어하고 심지어 N극과 S극의 방향인 자화방향을 뒤집는 것은 여전히 물리적 난제다.
전기장만으로 자화방향을 바꾸다
국내 연구진이 자기장 없이, 순전히 전기장에 의해 N극과 S극이 바뀌는 자석을 발견했다. 김기훈 서울대 물리천문학과 교수와 이순칠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팀이 전기장만으로 물질의 자화방향을 조절한 것이다. 이처럼 전기장만으로 N극과 S극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기장을 만드는 데 따르는 열손실을 피할 수 있어 초저전력 자기센서나 고집적 자기 메모리 소자를 구현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전자석을 한번 기억해 보세요. 자석 물질 주위에 전선을 코일 형태로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는 실험을 한 적 있으시죠? 그 때 코일내부에 자기장을 공간에 형성하면 이 자기장의 영향으로 자석 물질의 자화율이 커지게 됩니다. 코일 내부의 전류 방향을 바꾸면 렌즈의 법칙에 의해 자기장의 방향도 바뀌고 이에 따른 자화율 방향도 반전이 되죠. 이번 저희 팀의 연구결과는 기존의 전자석에서 코일 없이 물질만 있고, 물질이 자석이 되지만 전류가 흐르지 않는 부도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물질 양단에 전선을 연결해 전압 (전기장)만 걸어주면 자화가 생겨나고 그 방향도 전기장의 방향에 따라 반전될 수 있는 거죠. 따라서 전압 혹은 전기장으로만 물질의 N극과S극이 바뀌는 신자석 물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드디스크 같은 정보기록소자의 핵심소재로 사용되는 자성물질은 주로 자기장으로 N극과 S극을 국소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정보를 기록한다. 하지만 이 경우 가장 치명적인 한계가 작용하는데, 바로 자기장을 만들기 위해 전류를 발생시키는 과정 가운데 열 손실이 크다는 점이다.
"자기장을 이용하려면 전류를 흘려야 합니다. 이 때 전류가 흐르도록 전자를 이동시키는 힘, 곧 전기장이 필요하고 일반적으로 전류와 전압이 함께 일정시간을 유지하려면 우리가 아는 전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전력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기존의 자기장을 이용하는 자석 방식에서는 전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돼요. 원하는 자기장을 많이 만들려면 전류를 많이 흘려보내야 하는데 그에 비례해서 전류를 흐르기 어렵게 하는 저항이 발생하죠. 그로 인해 많은 에너지가 열로 손실되므로 그만큼 에너지가 더 필요한 거죠."
자기장을 이용할 경우 발생하는 또 다른 단점은 상대적으로 큰 자기장을 쓰는 소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코일을 감아야하는 특징적인 구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금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하드디스크의 집적도를 향상 시키는 데, 시대의 요구에 맞춰 자기 정보 쓰기 소자를 소형화하는 게 어려웠다.
"자기장을 이용하는 가운데 많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반면 자기장이 아닌 전기장으로 N극과 S극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전류가 아닌 전압으로 자화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어 초저전력 자기센서나 고집적 메모리소자 등 응용의 폭이 넓어지죠."
기존에도 전기장으로 자화를 조절했다는 연구보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실험들은 자화의 변화가 너무 작아 실용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방향을 뒤집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설사 방향이 뒤바꼈다 해도 매우 낮은 극저온이나 유한한 자기장내에서나 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김기훈 교수팀은 기존의 한계를 개선했고 외부 자기장에 의존하지 않은 채 전기장만으로 자화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전기장? 자기장?
과학계에서 해당 연구는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사실 대중들에게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차이는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김기훈 교수 역시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도, 이것을 간단히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언급했다.
"우선 물질에서 전기장이나 자기장이 생기는 원인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자' 라는, 음전기를 띠는 기본 입자가 있습니다. 전자들이 정적으로 배열돼 음과 양의 분포가 공간적으로 불균일한 상태를 유지하면 양전하에서 음전하 방향으로 전기장이 생깁니다. 반면 공간에 분포돼 있던 음전하나 양전하가 연속적인 흐름을 만들어 우리가 아는 전류가 형성되면 전류가 생성되는 주변에는 자기장이 생겨납니다.
전기장과 자기장은 결국 물질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분포나 흐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나 할까요? 생성된 전기장 및 자기장은 빈 공간에도 존재해요. 전자의 흐름이나 분포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면 빈 공간에서도 이는 존재하고 퍼져나가기도 하죠. 전기장과 자기장은 수직관계를 유지하면서 파동으로 전파하는데 이를 전자기파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TV와 라디오, DMB, 휴대폰 등 모든 무선 전자기기는 이러한 전자기파를 공간으로 보내기도 하고 받아내기도 하는 장비인 셈입니다."
즉, 자기장은 전기장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그림자 같은 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전기장만으로 물질의 자화방향을 바꿨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의 자석물질이다. 일반적으로 코일에 전류를 흘려 자기장이 공간에 생겨나는 맥스웰 방정식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전자석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기훈 교수는 "실제 이 물질에 적용되는 전자기적 법칙의 올바른 기술도 기존 물질에 대해 다뤄 왔던 맥스웰 방정식만으로는 불충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강체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
![전기장을 합성 산화물에 걸었을 때 일어나는 미시적 변화. 윗 부분 흰색 사각형은 이번 연구에서 새로 합성된 Ba0.5Sr1.5Zn2(Fe0.92Al0.08)12O22를 뜻한다. 사각형을 나누고 있는 선들은 자기구역벽을 의미한다. ⓒ 한국연구재단](/jnrepo/uploads//2014/07/500.jpg)
자기장 없이 전기장만으로 자화방향이 뒤집힌다면 실생활에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때문에 김기훈 교수팀은 열손실이 동반되는 자기장이 필요 없는 다강체 단결정 물질을 합성하고 자화변화의 기본 원리까지 규명하는 데 이르렀다.
"이번 연구는 애초부터 신 개념 자석 물질을 개발하겠다는 목표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다강체라는 물질을 이해하고 새로운 다강체 물질을 발견하려는 노력에 따른 결과였죠. 사실 오랫동안 많은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이상적인 물질군이었습니다. 만약 해당 물질이 발견된다면 다강체 물질군에서 자기장 없이 전기장만으로 자화율 조절이 가능할 것이라는 개념적 '상상'이나 '예측'은 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60년 이상 이 같은 '상상'을 만족할만한 물질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못했습니다.
저희 연구팀은 다강체 물질의 원리를 이해하고 실험으로 증명하는 일을 10여 년 간 지속했습니다. 이로부터 축적된 연구 경험과 능력으로 새로운 물질 탐색에 나섰죠. 무엇보다 '자성-전기성'이 물질내부에서 가장 크게 결합된 물질을 발견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물질 발견이 이뤄짐과 동시에 신개념 자석의 실질적인 작동을 검증하게 된 것이죠."
연구가 더욱 심화된다면, 고집적 자기메모리 물질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상온에서 결과를 만들지 못해 상용화에 이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관측된 크기만으로도 하드디스크의 자화 쓰기 소자를 손쉽게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받고 있다. 더불어 소형화가 가능하고 전력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초저전력 구동 소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을 배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경우로 진행됩니다. 우연과 상상력, 두 가지가 작용하는 거죠. 이번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저희 연구실은 여름 방학 중 학부 학생이 연구에 참여합니다. 이 때 연구실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료 합성을 시도하곤 하죠. 잘 알려진 유명 논문에서 최근 연구결과를 다시 재현해보기 위해 단결정을 합성하는 방식으로요.
연구는 지난 2006년 여름, 학부 인턴 학생에게 당시 일본 선도 연구그룹의 결과에서 합성조건을 재현해 보라고 주문한 것에서 시작한 셈이에요. 당시 일본 연구진은 상온가까이에서 다강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정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발견된 결정의 단점이 있었어요. 다강체가 되기 위한 임계자기장이 1만 가우스 정도로 커서 유용하지 못하다는 점이었죠. 임계자기장을 어떻게 낮출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당시 학부생들에게 특정 위치의 Fe 원자를 Al로 치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후에 놀랍게도 임계자기장이 체계적으로 1 가우스 정도까지 낮아지고 결국 외부자기장 없이 다강체가 됐습니다. 동시에 합성된 새로운 단결정이 알려진 어떤 다강체보다 자기-전기 상호 작용이 가장 큰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번 연구는 지난 60년 간 과학자들이 찾던 물질군에서 최고의 자기-전기 상호 결합을 가진 물질을 찾고 신 개념 자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김기훈 교수는 "이 같은 물질에 대한 연구와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고무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우리 연구팀의 논문에서 밝혀진 원리를 이용한다면 상온에서도 실현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또한 크기도 여전히 클 수 있을 것 같다"며 상용화와 기술력, 두 마리 토끼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앞으로 더욱 심화된 연구로 우리만의 물질 특허를 이루고 싶다는 김기훈 박사. 그는 일상에서도 사용되는 소자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포부를 전했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4-07-0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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