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는 약 5천억에서 1조 개의 세균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록 많은 수의 세균이 수십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제 살길’을 찾으며 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최근 노스웨스턴대학교, 텍사스 사우스웨스턴대학교 의료센터 공동 연구진이 이 미세하고도 단순한 생물체가 외부 환경의 물리적 특성을 어떻게 전달하고 유전하는지를 밝혀낸 연구결과가 Science Advances 저널에 발표됐다.
비가역성,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상처’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세균은 외부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하여 복잡한 조절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단백질 구조를 변화시키는 유전학적 메커니즘,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후생유전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생존하고 번식해 왔다. 이러한 생리적·유전적 과정에서 세균의 유전자에는 손상 혹은 흔적이 남게 되는데, 일부 과정은 한 번 발생하면 이후에 다시는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은 세균이 특정 환경에서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사멸하게 된다. 이 개념을 ‘비가역성’이라고 하며 생물학에서 유전적 특성이 환경적 요인과 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특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균은 세포에 인코딩된 ‘기록’이 아니어도 짧고 일시적 변화와 주변 환경을 ‘기억’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외부 환경 정보가 DNA에 인코딩되지 않고 유전자 조절 관계 네트워크 수준에 저장돼 몇 세대에 걸쳐 전달된다는 의미다.
연구책임자인 모터(Adilson E. Motter) 노스웨스트대학교 교수는 “우리는 일시적인 유전자 조절 및 변화가 네트워크에 기억되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소위 ‘변화의 메아리’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유전적 변화는 ‘기록 VS 기억’?
연구팀은 세포가 DNA가 아닌 네트워크를 통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의 수학적 모델을 활용해 세균 유전자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했다. 실험에 사용된 대상은 Escherichia coli(대장균)이며, 연구진은 유전자 수가 약 4천 개로 그 수가 적고 단일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를 연구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연구결과 대장균 유전자의 비가역적 활성화가 세균의 적응력을 높이고, 환경적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전자가 환경 변화에 대해 비활성화되면 바로 옆에 있는 유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미 비활성화된 유전자는 비가역성으로 인해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르게 인접한 유전자에게 정보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다. 유전자 변화 과정이 재활성화되면 외부 영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속형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이러한 연쇄 반응이 본격화된다.
연구팀은 이 과정을 통해 세균이 생존을 위해 어떤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특히 또 다른 유기체가 비유전적 유전성을 보이는 현상을 이러한 세포의 비가역적 교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모터 교수는 “생물학에서 무엇이든 보편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하지만 객관적으로 대장균의 조절 네트워크가 다른 유기체에서 발견될 수 있는 현상과 유사하거나 더 간단하기 때문에 일반적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해당 기사의 참고 논문 보러가기: Irreversibility in bacterial regulatory networks (DOI: 10.1126/sciadv.ado3232)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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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10-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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