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보다 인류 역사와 오래 함께해 온 바이러스의 경우 사멸 후에 관한 연구가 많지 않다. 바이러스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항생제 치료로 바이러스가 사라진 후에도 우리 몸의 면역에는 감염으로 인한 흔적이 남는다고 한다.
C형 간염 바이러스가 사라진 후 남는 흉터
C형 간염은 C형 간염 바이러스(HCV)의 혈액이나 체액을 통한 전파로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질환이다. 감염되면 절반 이성이 만성으로 진행되며, 장기간 염증이 반복되면서 간이 굳는 간경화나 간암 등 합병증을 초래한다. 실제로 간암의 80~90%가 B형이나 C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통계도 있다. 백신이 있는 B형 간염과 달리 C형은 아직 백신이 없다. 다행히도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하면 90% 이상 완전히 바이러스를 박멸시킬 수 있다.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끝일까. 최근 국내 연구진은 C형 간염 바이러스가 약물 치료로 사라진 뒤에도 면역에는 ‘흉터’와 같은 흔적이 남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존에도 C형 간염 치료 후 환자의 면역 체계가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는다는 보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분자 수준에서 감염 이후 면역 체계의 변화를 규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면역세포인 조절 T세포의 변화에 주목했다. 조절 T세포는 면역 반응을 조절하고, 항상성 유지를 담당하는 세포다. C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말초 혈액 속 조절 T세포의 수가 늘어나고, 활성도도 달라진다.
연구진은 만성 C형 간염 환자의 혈액을 채취해 항바이러스제 치료 전후 조절 T세포의 상태를 비교했다. 놀랍게도 바이러스가 제거된 후에도 혈액 속 조절 T세포의 많은 수가 유지됐다. RNA 염기서열 분석으로 자세히 살펴본 결과, 바이러스가 제거된 뒤에도 염증성 사이토카인인 종양괴사인자(TNF) 생산 능력이 사라지지 않음을 확인했다. 감염으로 인해 염증성으로 변한 조절 T세포의 특성이 완치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다.
‘면역 흉터’의 의미
면역 흉터가 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항바이러스제를 활용한 간염이나 합병증 발병 위험을 효과적으로 줄이지만, 면역에 남은 흔적이 회복된 환자의 면역 체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추가 실험에서 연구진은 유전자의 후천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기법을 이용해 치료 전후 조절 T세포를 비교 분석했는데, 면역에 염증성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염증성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생기면 만성 C형 간염 환자가 완치 후에도 염증성 질환이 잘 생기는 면역 체질로 변하게 될 것으로 추정한다”며 “더 나은 환자 치료 및 관리를 위해 조절 T세포에 남은 흔적이 환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추가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만성 바이러스 감염에서도 C형 간염 바이러스와 유사한 후성유전학적 흔적이 남아 있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후 후유증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롱코비드(Long Covid)’의 경우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 역시 조절 T세포에 남은 ‘면역 흉터’가 원인일 수 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신의철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바이러스 면역 연구센터장은 “다른 만성 바이러스 감염에서도 유사한 후성유전학적 흔적이 남아 있는지 살펴볼 계획”이라며 “어쩌면 코로나19 이후에 겪는 롱-코비드 역시 조절 T세포에 남은 흔적이 원인일 수 있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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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07-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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