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허파가 없다. 허파는 외부로부터 산소를 받아들여 혈액에 보내고, 혈액이 운반해온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데 지렁이에게는 이런 과정이 없다. 허파가 없다 보니 당연히 코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렁이도 생물인 만큼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지렁이는 어떻게 호흡을 하는 것일까? 비밀은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있다. 혈액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 단백질은 갯지렁이의 혈액 속에 다량 포함되어 있다.
지렁이는 허파가 없는 대신 피부로 호흡을 하지만, 피부는 허파처럼 호흡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산소를 전달하는 능력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약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지렁이만의 특수한 헤모글로빈이다.
지렁이의 헤모글로빈은 인간의 것과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산소를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은 수십 배에 달한다. 이런 점 때문에 전문가들은 지렁이가 피부를 통해 전달하는 산소의 양은 적지만, 탁월한 산소 전달 능력을 가진 헤모글로빈을 통해 그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이 같은 지렁이의 혈액을 이용한 약품 원료를 개발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산소 전달 능력이 뛰어난 지렁이의 헤모글로빈이 대량의 산소를 필요로 하는 각종 질환에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갯지렁이 혈액의 산소 운반 능력은 인간의 수십 배
의료기술 전문 매체인 메디컬익스프레스(Medical Express)는 프랑스의 양식(養殖) 전문 벤처기업이 갯지렁이의 헤모글로빈을 이용하여 약품의 원료을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개발에 성공한다면 인간의 난치병 치료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기사 링크)
갯지렁이 혈액으로 약품 원료를 개발하고 있는 벤처기업은 ‘아쿠아스트림(Aquastream)’이다. 이 회사는 현재 자체 양식장에서 매년 수백 만 마리의 갯지렁이를 키워 다양한 제제를 생산하고 있다.
아쿠아스트림社의 연구원이자 갯지렁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그레고리 레이몬드(Gregory Raymond)’ 박사는 “갯지렁이의 헤모글로빈은 인간 헤모글로빈 보다 40배 이상의 산소를 운반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라고 “특히 혈액형에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이몬드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헤모글로빈의 산소 운반 기능이 뛰어난 기술을 상용화했을 경우 사람의 혈액을 대신할 수 있는 수액으로 만들어 응급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패혈증과 같이 갑자기 다량의 산소가 필요한 질환이나, 장기 이식 수술에서 장기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작업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대체 혈액 개발 과정에서 갯지렁이의 장점 드러나
갯지렁이는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낚시용 미끼 외에는 별다른 용도가 없는 동물이었다. 그랬던 이 환형동물이 의료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 광우병이 유행하고, 전 세계에 에이즈(AIDS)가 창궐하면서부터다.
타인으로부터 혈액을 공급받았다가 뜻하지 않게 불치의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을 찾는 작업에 갯지렁이 혈액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 것.
후보 물질로 여러 동물의 혈액이 거론되었지만, 갯지렁이의 혈액만큼 적합한 혈액은 없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헤모글로빈의 뛰어난 산소운반 능력과 함께 혈액형과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본격화된 갯지렁이 혈액 연구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이내 크고 작은 벽에 부딪쳤다. 갯지렁이의 세포가 사람에 들어갔을 때 발생하는 거부반응과 갯지렁이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충분한 헤모글로빈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문제점 등이 드러났던 것이다.
하지만 1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이에 거부반응을 낮출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고, 대량으로 갯지렁이를 사육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아쿠아스트림社는 갯지렁이 대량 사육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양식전문 기업이다. 이 회사는 대량 양식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치료목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수준의 갯지렁이 헤모글로빈 제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기술을 발판으로 하여 지난 2015년에는 갯지렁이 혈액을 응용한 대체 혈액의 임상 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2016년에는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인간의 신장 이식에 사용되는 대체 혈액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60여 명의 환자가 이 대체 혈액 임상 시험에 참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레이몬드 박사는 “갯지렁이가 보유하고 있는 헤모글로빈의 비밀은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생존 능력에 있다”라고 밝히며 “갯지렁이는 만조 시에 바다 속에서 다량의 산소를 축적한 다음, 간조 시에는 물에서 나와 활동해도 8시간 이상 동안 생존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갯지렁이에서 헤모글로빈이 상용화된다면 이식 한 피부의 보호 및 뼈 재생을 촉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혈액의 탄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이 같은 구상이 실현된다면 갯지렁이의 혈액을 사용하여 이식용 장기를 체외에서 더 오래 살려 둘 수 있게 됨으로써, 더 많은 이식 환자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한 정상적인 혈액 공급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터나 재해 현장에서도 도움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 김준래 객원기자
- stimes@naver.com
- 저작권자 2017-08-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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