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과학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과학자들은 빛을 이용해 아주 작은 미시세계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관찰한다. 물질의 새로운 특성을 파악하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여러 기술이 탄생했다. 빛은 긴 인류의 역사 동안 함께였지만, 아직도 우리는 빛을 온전히 이용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빛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 들을 끊임없이 찾아낸다.
주민등록번호는 같지만 이름이 달라요
분자에게는 일종의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와 수를 적는 분자식이다. 가령, 탄소 원자 2개, 수소 원자 6개, 산소 원자 1개로 구성된 에탄올은 C2H6O라는 분자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자연계의 많은 분자는 분자식은 같지만 구조가 다른 ‘쌍둥이 분자’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이성질체라 부른다. 같은 C2H6O라는 구성을 가져도 연결 순서가 달라지면 이성질체인 ‘다이메틸에터’가 된다. 구성 원자가 동일하지만 에탄올은 액체, 다이메틸에터는 기체다. 또 에탄올은 물에 잘 녹지만 다이메틸에터는 물에 잘 녹지 않는 등 특성도 다르다.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이성질성을 고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에탄올과 다이메틸에터의 차이처럼 같은 분자식을 가진 물질이라도 이성질성에 따라 매우 다른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의약품의 합성에 있어서는 이성질성의 고려가 더욱 중요하다. 치료에 유용한 분자의 이성질체가 때로는 독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유용한 이성질체만을 선택적으로 합성하거나, 쉽게 관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이유다.
시각의 원리 모방해 이성질성 조절
일본 훗카이도대 연구진은 지난 2월 28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에 빛과 열을 이용해 이성질성을 조절할 수 있는 새로운 분자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논문과 함께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연구진은 시각세포에 존재하는 광수용체의 작동 메커니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망막의 로돕신 분자는 빛을 흡수하면 이성질성이 변하며 전기적 변화가 일어난다. 정확히는 로돕신 분자가 빛 에너지를 흡수하면 일부를 꼬아 회전하는 변환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전기 신호가 뇌에 전달된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카쓰야마 아키라 일본 훗카이도대 약학부 교수는 “로돕신처럼 빛에 의해 구조를 바꾸는 분자를 개발하는 것은 광화학의 도전과제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벤즈아마이드(benzamide)라는 간단한 유기 분자의 산소를 황(S)이나 셀레늄(Se) 등 칼코젠 원소로 치환하면 빛에 의해 회전을 유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벤즈아마이드는 항암제 등 의약품, 화장품, 염료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되는 물질이다. 칼코젠 원소를 함유한 새로운 분자는 빛과 열에 반응했을 때 각각 다른 형태의 이성질체로 변했다. 연구진은 변형이 진행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적 계산도 제시했다.
이치카와 사토시 훗카이도대 약학부 교수는 “분자의 구조적 변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빛을 사용하는 것은 변화가 발생하는 위치와 시간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생물학 연구에 적용되거나, 의약품으로 개발될 수 있는 새로운 빛에 의해 활성화되는 분자들을 지속 발굴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빛에 의해 분자를 회전시킨 연구 자체가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1999년 베르나르트 페링하 교수는 빛에 의해 이성질화되는 분자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회전할 수 있는 분자 날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로 불리는 분자 기계를 합성한 공로로 2016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 권예슬 리포터
- yskwon0417@gmail.com
- 저작권자 2024-04-12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