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후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학교생활에 적응이 잘 되느냐’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적응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전도연 배우가 했던 대사를 패러디해보면, “연구과제를 수주하기가 너무 어렵고, 지도하던 대학원생들이 모두 졸업했기에, 연구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코딩부터 논문작성과 투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야 하고, 한 학기 16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채점하면서 어지럽고 멀미가 나는 듯한 경험을 했어도,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흠잡으려야 잡을 것이 없다.” 아침에 눈 뜨고 출근하고 싶어지는 직장, 젊은 학생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과 성장을 지켜보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던 2021년 5월부터 1년간, 첫 국무회의에 참석해 자기소개를 겸하여 발언 기회가 주어졌을 때 ‘비현실적인 날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었을 만큼,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낯선 역할과 책임을 소화해야 했었다. 그간은 생각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과학기술 정책 하나하나에 대하여 잘 듣고 이해하여 이슈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하는 일, 거의 매일 참석해야 했던 각종 행사, 현장방문과 간담회, 언론 기고 및 부담스러웠던 방송 출연, 국회 대응, 입법 제안, 국정감사, 타 부처와 협의.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일도 쉬운 일도 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분들이 적극적이고 열심이어서 용기와 에너지를 얻었던 것 같다. 그간 해오던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 그저 내게 이런 역할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했고, 내가 해야 하는 역할과 책임을 잘 감당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분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의미 있고 보람 있길 바랐다.
작년 KISTEP에서 일반 국민 1,0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학기술의 역할 및 중요도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국가정책 수립·운영에 과학기술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응답이 86.3%, “개인·국가·사회적으로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응답이 87.7%였다. 우리 국민은 과학기술이 국제질서의 중심에 놓이는 기정학(技政學) 시대가 도래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과학기술 경쟁력의 확보는 국가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인플레 감축법, 반도체 산업 지원법 등을 통해 과학기술에 기반한 글로벌 패권경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각 나라는 대체 불가능한 과학기술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세계무대에서 다른 나라와 협력하고 협상할 기회를 갖는다.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진 이 시대를 사는 과학기술인으로서, 과학기술인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본다. 2020년 출범한 21대 국회의원 중 과학기술인으로 분류된 국회의원은 11명인데, 대부분은 오랜 기간 과학기술정책 관련 업무를 해 왔기 때문에 과학기술인으로 분류가 되었을 뿐, 실제 과학기술을 전공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보건의료전문가로 분류된 국회의원 9인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외교 48인, 법무 46인, 언론 28인 등과 비교했을 때 턱없이 적은 숫자이다. 국가의 중요한 과학기술정책을 기획하고 구현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일하는 공무원 중 과학기술인 또한 소수이다. 자연현상의 원리나 공학 기술에 대한 이해, 깊은 사고와 탐구에 익숙한 과학기술인들이, 제한된 조건 안에서 최적의 해법을 찾는 훈련이 된 과학기술인들이, 정책을 만들어 구현하고, 정책을 뒷받침하는 법률을 만드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인들이 이러한 역할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적절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공직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크게 열려있어야 한다. 조직에는 새로운 시각과 문제를 푸는 새로운 방법,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경험하는 기회를 줄 것이고, 과학기술인 개인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더욱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임무 수행 후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면, 더 큰 시각을 갖고 연구에 몰입하는 충전의 계기가 또한 될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에는 기술패권 경쟁 시대를 대처하는 선도적 전략이 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인생 사용법은 삶이 끝나도 오래도록 남을 무언가를 위하여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순간에도 많은 과학기술인이 경건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세상에 남겨놓을 연구성과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 학문 후속세대를 키우거나 좋은 연구성과를 남기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공공의 영역에 나아가 좋은 정책을 남기고 좋은 조직문화를 남기는 것도, 비슷한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 이 글은 한국물리학회에서 발간하는 웹진 ‘물리학과 첨단기술’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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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 저작권자 2023-05-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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