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어느 날, 뉴질랜드 남섬의 한 동굴에서 거대한 몸집의 숫양 한 마리가 발견됐다. 이 양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자란 털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확인 결과 그 양은 6년 전에 털을 깎으려던 목장 주인을 피해 도망친 숫양이었다.
6년 동안 주인을 피해 푸른 초원과 동굴에서 기거해온 이 숫양에게는 ‘슈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의 주인공처럼 큰 몸집과 엉뚱함을 지녔다는 이유 때문이다.
발견된 지 며칠 후 슈렉은 뉴질랜드 최고의 전문가들에 의해 그동안 수북하게 자란 양털이 모두 깎여졌다. 이때 나온 양털은 무려 28㎏으로서 남성 정장 20벌을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단숨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양이 된 슈렉은 전국을 순회하며 뉴질랜드 양모 산업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발견 당시 이미 사육 숫양의 최대 장수 연령(10년)이었던 슈렉은 그로부터 6년 후인 2011년 6월 6일 안락사 되었다. 3주간 노환을 앓던 중 수의사의 조언으로 안락사가 행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반 숫양보다 6년이나 더 오래 살며 인기를 누렸다.
2012년에는 조선 시대 환관들의 족보인 ‘양세계보’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우리나라 연구진에 의해 발표됐다. 그에 의하면 환관들의 평균 수명은 70세로, 당시 양반들보다 14~19년을 더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그들 중 3명은 각각 100세, 101세, 109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연구 결과는 조선 환관들이 입양을 통해 대를 잇고 족보를 남긴 덕분에 가능했다. 환관의 족보 기록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DNA 메틸화로 여성적 특징 촉진돼
슈렉과 조선 환관들이 장수한 이유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거세가 바로 그것이다. 거세가 동물의 수명을 연장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됐는데, 사람의 거세가 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양세계보의 연구가 최초였다. 과학자들은 거세가 남성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함으로써 장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거세된 숫양이 보통 숫양보다 DNA의 노화가 지연되고 DNA 메틸화에 의해 여성적 특징이 촉진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국제 학술지 ‘이라이프(eLife)’에 발표됐다. 남성 호르몬이 DNA 노화에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을 최초로 밝혀낸 연구 결과인 셈이다. 수컷의 평균 수명은 암컷보다 약 10% 짧은데, 이는 인간을 비롯해 모든 포유류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번 연구를 위해 뉴질랜드 오타고대학 연구진은 DNA 노화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많은 양의 후성유전학 생체시계를 생성했다. 그 후 거세된 숫양과 온전한 숫양의 후성유전학 생체시계를 비교한 결과 노화 속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이 연구에는 후성유전학 생체시계를 발명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스티브 호바스 교수도 참여했다. 그는 “지금까지 200종이 넘는 종을 관찰한 결과 동물들의 노화에 대한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다”며 “이번의 숫양 연구는 남성 호르몬이 노화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숫양과 암양이 DNA 노화에서 매우 다른 형태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거세된 숫양은 특정 DNA 부위에서 매우 여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슈렉이 유명해진 진짜 이유는 거세 덕분
이번 연구의 저자 중 한 명인 오타고 대학의 팀 호어(Tim Hore) 박사는 “거세의 영향을 많이 받는 부위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남성 호르몬 수용체와 결합된다”며 “이는 거세, 남성 호르몬, 성별에 따른 DNA 노화 차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어떤 조직이 호르몬 수치에 크게 영향을 받는지 이해하기 위해 생쥐를 조사했다. 그 결과 피부, 신장, 뇌처럼 남성 호르몬 수용체가 발견되는 조직에서는 수컷과 암컷의 DNA 패턴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하지만 남성 호르몬 수용체가 발현되지 않는 조직은 수컷과 암컷의 DNA 패턴이 같았다.
이에 대해 팀 호어 박사는 “대부분 연구자들은 생물학적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 혈액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양의 DNA에서 성별에 따른 노화 효과를 발견한 것은 혈액이 아니라 피부였다”며 “이러한 현상은 생쥐에게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를 이끌었던 팀 호어 박사는 10년 전에 안락사한 숫양 슈렉에 대해서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슈렉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양이 된 이유 중에는 거세도 한몫했다는 것. 즉, 슈렉이 거세된 숫양이 아니었다면 동굴에서 발견되었을 때 이미 수명이 다해 죽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 이성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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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1-07-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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