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가 TED 강연에서 인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아프리카 속담이다. 엘 고어처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다득표했지만 패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두 속담 모두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인 공동체가 가진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회와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인구 집중으로 전 세계적으로 도시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도시로 끊임없이 모여들지만, 개인적 성향이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공동체의 연대감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지만 삶은 각박하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며 공동의 유대를 잃은 채 홀로 살아간다.
향약과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자랑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공동체 의식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멸종 직전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주택유형에서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파트는 여러 사람이 모여사는 공동주택이어서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단초가 될까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아파트는 최대 장점인 세대 간 독립성으로 인해 공동체 의식이 함양되기보다 오히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커뮤니케이션 단절이 심화하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 개인주의 심화와 공동체의 붕괴에 따른 도시문제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공동주택 계획을 수립할 때 커뮤니티를 중요 요소로 봐야 하는 이유다.
커뮤니티 개념과 아파트의 설치기준
‘커뮤니티’(Community)는 같음을 뜻하는 라틴어 ‘코뮤니타스’(Communitas)에서 왔는데, 이 말은 함께(Com)와 봉사하는 일(Munis)이 합성된 ‘코뮤니스’(Communis)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말로는 대부분 공동체로 번역하는데, 사전에서 공동체는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으로 정의하고 있다.
커뮤니티는 일반적으로 지연에 의해 저절로 생겨난 공동사회를 가리키는데, 사회학 분야에서는 저명한 학자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정의돼 활용되고 있다. 커뮤니티가 도시계획에 사용된 것은 1920년대 미국의 도시계획가 클라렌스 페리(Clarence Perry)가 뉴욕지역계획에 커뮤니티 조성을 위한 근린주구 이론을 적용하면서부터다.
195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니스벳(Robert A. Nisbet)은 커뮤니티 개념을 사람들의 행위, 상호작용, 공동체에 대한 인식, 친숙한 인간관계를 촉진하는 사회 및 조직의 구조와 질서로 구체화했으며, 이후 커뮤니티는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구성원 사이의 인간적 관계이면서 공간적인 개념으로 정립됐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소속감을 향상해 커뮤니티 기능을 활발하게 하는 것,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을 포용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결속력과 소속감을 배양하는 것 등이 도시계획 분야에서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주된 관심사들이다.
국내 아파트에서 커뮤니티의 역사는 1990년대를 태동기로 본다. 물론 그전에도 커뮤니티 공간은 아파트에 일부 설치되고 있었지만 1990년대부터 공유공간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생성돼 커뮤니티 시설이 본격 도입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아파트에서 커뮤니티가 크게 부각한 계기는 2002년 서울 도곡동에 주상복합아파트인 타워팰리스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타워팰리스는 휘트니스 클럽과 골프연습장, 수영장 등 이전 아파트들과는 차별화된 고급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 불어닥친 웰빙(Well-being) 열풍과 맞아떨어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아파트 브랜드 간 커뮤니티 확대 경쟁에 불을 붙였는데, 이로 인해 2000년대는 아파트에서 커뮤니티 공간이 급격히 늘어난 확산기로 본다.
2010년대 이후는 신개념 커뮤니티가 등장하고 질적으로 성장하는 도약기로 구분한다. 이 시기에 커뮤니티 시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는 정보통신기술(ICT)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입주민들이 참여하는 특화된 커뮤니티들이 등장하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에서 커뮤니티 설치는 '주민공동시설'이라는 이름으로 법적으로 의무화돼 있다. 과거에는 시설 종류에 따라 단지 세대수를 기준으로 설치기준이 각기 제시돼 있었는데, 2013년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주민공동시설 설치 총량제가 도입됐다. 아파트 단지별로 총량만 정하고 주민 수요에 따라 주민공동시설을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개선된 것이다.
아파트가 100세대 이상 1,000세대 미만일 경우 세대당 2.5㎡, 1,000세대 이상일 경우 500㎡에 세대당 2㎡를 합한 면적의 주민공동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아파트 규모에 따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시설 종류가 규정돼 있는데, 150세대부터는 경로당과 어린이놀이터를 설치해야 하고, 300세대부터는 여기에 어린이집을 추가해야 하며, 500세대 이상은 여기에 주민운동시설과 작은 도서관을 추가 설치해야 한다.
입주민 수요 고려한 커뮤니티의 진화
아파트에서 커뮤니티 시설은 거주자의 생활 복리를 위한 공동시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아파트 단지의 구성요소 중 하나면서 주민의 생활편의와 커뮤니티 활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아파트의 커뮤니티 공간은 사회적으로 주민자치 활동의 장을 제공하고 인간성 회복에 도움을 주며, 경제적으로는 생활정보 교환과 공동생활 실천 기능을 제공한다.
최근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은 점차 복합 및 대형화의 추세를 보인다. 예전에 만들어진 아파트에서 커뮤니티 공간은 법률에서 정한 최소기준에 따라 보육시설, 놀이터, 노인시설, 단지 내 산책로를 설치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요즘 아파트에서는 법정기준보다 더 넓게 하고 쓰임새도 계속 다양화되고 있다. 아파트의 개별 세대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역할만 하고 운동, 공부, 친목, 취미 활동은 물론 휴식과 손님맞이까지 다양한 활동을 커뮤니티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위해 휘트니스 클럽과 골프연습장은 대다수 아파트가 갖추는 기본시설이고, 여기에 GX룸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우나를 설치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아직 일부이지만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수영장이 들어서 인기다.
요즘 분양하는 아파트에서 자녀교육을 위한 독서실이 없는 경우는 찾기 힘들며, 책을 빌려볼 수 있는 작은도서관이나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도 환영받는다.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국공립어린이집이 상당수 설치되고, 영어 등 외국어교육시설이 들어서는 예도 있다.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이 진화하면서 백화점 문화교실이 부럽지 않다. 취미와 문화생활을 위해 명사 강연 등 교양강좌와 함께 단지 내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서예와 미술 등 입주민의 니즈에 맞춰서 다양한 문화교실이 진행된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우는 안전한 놀이터는 단지 중앙을 비롯하여 한곳 이상 설치하고, 경로당은 휠체어로도 이동할 수 있도록 높낮이 차가 없고 동선이 편하도록 계획한다. 아파트 옥외공간은 힐링을 위해 테마 산책로 등 특화된 조경공간으로 꾸미고 휴식을 위한 벤치를 적절히 배치한다.
최근에는 손님맞이를 위해 품격있는 게스트룸을 갖추는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으며, 고급스러운 스카이라운지도 선보이고 있다. 조식 서비스나 호텔식 컨시어지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아파트도 등장해 있고, 찜질방과 소극장 등 차별화하여 설치되는 아이템도 다양하다. 단, 아파트에 특화된 커뮤니티 시설의 경우 제대로 운영되려면 적절한 운영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도 중요한 문제다. 단지 집중 배치형은 커뮤니티 시설과 광장을 아파트 단지 중심공간에 계획 설치하는 형태인데, 거주자의 접근성을 높이고 하나의 건물 안에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배치하여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다.
주동 분포형은 소규모 주거단지 또는 지형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커뮤니티 공간이 주거동에서 그대로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주동통합형이다. 한편 분산배치형은 커뮤니티 시설의 용도에 따라 기능을 분할하여 계획에 적용한 형태이다.
복합커뮤니티센터형이라는 새로운 형태도 등장했다. 아파트 단지가 여럿 모여있는 경우 단지별로 커뮤니티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지구 거점에 집적시켜 공간 이용을 효율화한다. 이웃 아파트 단지와 함께 이용하기 때문에 효율성과 운영비 절감 제고 효과가 상당하다.
아파트는 공동체 회복과 상생을 꿈꾼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여파로 사람들의 생활반경이 좁아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고 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는 아파트의 커뮤니티 시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들을 살펴보면 재택근무자를 위한 단지 내 공유오피스를 제공하고,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해 전용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아파트도 등장했다. 아파트 단지 내 영화관과 글램핌장은 코로나19로 어려워진 문화생활과 야외활동을 대신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는 종식되더라도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19로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이 줄줄이 셧다운 돼 큰 불편을 주었는데, 앞으로 이같은 전염병이 또다시 도래할 수 있을 만큼 이를 충분히 커뮤니티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호흡기 감염병 발생을 고려해 공용공간의 최소화가 커뮤니티의 계획단계에서부터 고려돼야 한다. 공용물품을 줄이고 개인물품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서 커뮤니티 시설에 개인 수납시설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 2m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위해 운동시설 공간은 기존보다 더 넓게 계획해야 한다.
최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건설회사가 가장 높은 가격에 분양할 수 있는 펜트하우스가 들어갈 로열층 최상층 자리에 고급 스카이라운지를 설치했다. 입주민 전체가 초고층에서 아파트 주변의 풍경과 야경을 감상하고,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용공간을 만든 것. 원래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개인이 누렸을 혜택이 입주민 전체가 공동으로 누릴 수 있게 혜택이 확대된 셈이다.
펜트하우스 위치에 주민공동 커뮤니티 공간을 설치한 사례는 건설회사가 작은 이득 대신 더 큰 가치를 취한 사례로 평가된다. 1층이나 지하층을 주로 활용하던 커뮤니티 시설이 최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보다 입체적인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고층 아파트 주거단지의 경우 수직적으로 다양한 커뮤니티 주거공동체를 조성하고 있다.
국토가 좁아 우리나라처럼 고층 아파트가 발달한 싱가포르에는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많은데, 피너클던스턴 단지는 7개동 1,848세대로 구성된 대단지 아파트이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는 7개동 전체가 26층과 50층이 서로 연결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로 돼 있다. 바로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26층에는 800m 조깅트랙을 비롯해 휴게정원과 커뮤니티센터, 명상존 등이, 50층에는 800m 조깅트랙과 스카이정원, 놀이터, 전망데크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서 있다.(정서인 외 『해외 공동주택 커뮤니티 공간 특성에 관한 연구』)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들어설 아파트 단지에서는 커뮤니티 시설이 1층이나 지하층에 몰려있는 게 아니라 중간층이나 최상층으로 올라가고 입주자의 수요를 고려해 다양한 형태로 발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파트에서 커뮤니티 공간의 끊임없는 진화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회복과 새로운 상생의 방식을 알려주고 있다.
- 김홍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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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1-05-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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