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와 복잡성은 날로 높아져 간다. 그와 동시에 연구에 필요한 지식과 자원의 양도 점점 늘어나면서, 많은 연구자와 연구기관이 서로 벽을 허물고 협력의 문을 열어나가고 있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과학기술 경쟁 속에서 전략적 협력연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협력연구의 네트워크는 더욱 촘촘하고 빽빽하게 확장되고 있다.
협력연구의 참여자는 크게 두 가지 실익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협력을 통해 파트너와 당초 목표로 했던 공동의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로, 협력 과정에서 파트너의 연구 방법론이나 노하우 등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여 미래의 연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전자는 협력의 직접적인 결과물로서 단기적인 실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자는 파트너가 가진 지식을 내재화함으로써 협력이 끝난 후에도 보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실익이라고 볼 수 있다. 협력연구의 진정한 가치는 이 두 가지 실익을 동시에 누리는 것에 달려있다.
이와 관련하여, ‘흡수역량’이라는 개념이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왔다.
흡수역량이란 ‘과거에 축적된 R&D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외부 지식을 더 효과적으로 탐색, 수용, 활용하게 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즉, 고도의 흡수역량을 가진 개인 또는 조직은 외부 지식을 통해 미래의 R&D 생산성을 빠르게 높일 수 있다.
이 개념은 연구소, 대학, 기업 등 다양한 연구 주체를 포함하여, 넓게는 국가 혁신생태계 차원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혁신생태계는 출연(연) 제도를 통한 흡수역량 구축에서 시작되었다.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R&D 수행을 통해 선진국의 공업기술을 빠르게 흡수, 국내 산업에 적용하는 것이 출연(연)의 성공 전략이었다. 출연(연)을 따라 민간에서도 R&D 투자를 늘려가며 자체 흡수역량을 키우게 됐고, 외부 학습을 토대로 독자적인 제품·공정 개발에 나서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혁신생태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 끝없이 확장될 혁신생태계 속에서, 협력연구를 통한 학습 기회도 점점 더 풍부해지고 있다. 그러나 협력연구를 통해 모든 참여자가 동등한 학습 기회를 얻을 것이라 보긴 어려운데, 그 이유는 각 참여자가 보유하고 있는 흡수역량 수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즉, 파트너와 함께 단기적인 성과물은 공유할 수 있을지라도, 학습 능력의 차이로 인해 연구 역량의 발전 속도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파트너 간 흡수역량의 차이는 상호 비대칭적인 학습(asymmetric learning)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협력연구의 진정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적 학습은 기업 간 R&D 협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와 소니의 LCD TV 기술 협력을 들 수 있다(Gnyawali and Park, 2011). 당시 전 세계 TV시장의 전통 강호였던 소니는 7세대 LCD 패널 기술을 적용한 평면 TV를 개발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손을 잡는다. 삼성전자는 기존 CRT 브라운관 TV시장에서 생산규모, 제조기술, 평판 등 많은 부분에서 소니에 뒤지고 있었지만, 우수한 LCD 패널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았던 두 기업은 2003년, ‘S-LCD’라는 연구합작법인을 설립하여 전략적인 협력연구에 돌입했고, 마침내 전 세계 LCD TV시장을 석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협력이 종료된 후, 두 기업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삼성은 LED/OLED 기반의 후속 기술을 개발·적용하여 차세대 TV에서도 리더의 지위를 굳힌다. 반면, 소니는 삼성과의 기술 경쟁에 밀려 점점 입지를 잃게 됐고, 아직도 두 기업 사이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있다.
협력을 통해 삼성과 소니는 LCD TV 개발에서 함께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는 협력의 단기적인, 일차적인 결과일 뿐이었다. 소니는 삼성의 LCD 기술을 자사 브랜드(BRAVIA)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삼성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소니의 제조기술과 노하우를 학습하여 차세대 소자 기술을 독자 브랜드(PAVV)에 접목해 나아갔다.
애당초 윈-윈을 목표로 한 협력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기업의 흡수역량 차이가 결국 협력 이후의 장기적인 성패를 가르게 된 것이다. 만약 그 차이가 작았더라면, 두 기업의 향방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 간 R&D 협력에서는 오늘의 파트너가 내일의 경쟁자가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독자적인 흡수역량 구축은 기업에게 매우 중요한 R&D 전략이다. 비록 기업만큼 극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진 않지만, 전략적 협력관계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 다른 연구기관에서도 흔히 발생한다.
협력관계의 변동성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흡수역량 축적과 장기적 학습은 R&D를 수행하는 어느 조직에게나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흡수역량은 어떻게 축적되는 것일까?
흡수역량의 존재와 개념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는 과학기술정책 분야 내 많은 합의가 있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식별하고 측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연구주제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흡수역량의 주요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Enkel et al., 2018).
① 조직의 외부환경 수용력 (조직문화, 동기부여, 보상체계 등)
② 외부 지식과 연관된 사전 배경지식수준
③ 지식 전달자-수용자 간 사회적 관계(신뢰)의 깊이
④ 기존 지식과 새로운 외부 지식을 결합하는 능력
흡수역량은 위 네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요소가 얽혀있는 복잡한 개념이다. 특히, 조직마다 각 요소 별로 강점과 약점이 다르기 때문에, 최선의 흡수역량 발전전략도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형성되는 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바로 독자적인 R&D 경험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Cohen and Levinthal, 1989).
즉, R&D 활동은 직접적인 연구성과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흡수역량을 강화하고 미래의 협력 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수확체증의 법칙을 따른다.
융합과 집적화로 심화되는 비대칭적 학습
협력과 함께 오늘날 혁신생태계를 특징짓는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융합(convergence)과 집적(clustering)이다. 다학제적 융합연구와 지리적 집적화는 협력 파트너 간 비대칭적 학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변수다.
첫째로, 파트너 간 학습 비대칭은 융합형 협력에서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데, 아래 그래프를 통해 이를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프의 가로축은 파트너 간 기술 분야의 이질성(즉, 융합의 수준)을, 세로축은 파트너로부터 새롭게 배우게 되는 학습 수준을 가리키며, 그래프의 오른쪽으로 이동할수록 흡수역량이 높은 A와 낮은 B 모두 파트너로부터의 학습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는 B보다 전반적으로 높은 학습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융합 수준에 따라 더 큰 학습 증가 폭을 보임으로써 둘 사이의 학습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비대칭적 학습이 융합형 협력에서 더욱 극명해지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융합형 협력에서 학습 효과를 높이는 좋은 방법은 바로 독자적인 융합연구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Quintana-Garcia and Benavides-Velasco, 2008). 융합연구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수용·결합하는 능력을 키우게 되면, 파트너로부터 이질적인 기술을 학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융합연구 역시 협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수확체증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한편, 지리적 집적화는 파트너 간 지식 확산을 촉진함으로써 비대칭적 학습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흥미로운 예로, 18~19세기에 활동한 클래식 음악가들의 집적화와 그들의 (작곡)성과 관계를 들 수 있다(Borowiecki,2013). 오늘날 많은 연구기관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듯이 당시 음악가들도 문화예술이 발달한 주요 대도시(파리, 빈, 런던 등)에 밀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다양한 예술가와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Borowiecki(2013)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음악가들은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시기에 더욱 뛰어난 성과를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이미 명성과 실력이 뛰어난 소수의 음악가들이 집적화의 혜택을 더 크게 누렸다. 기존의 명성 덕분에 이들은 더 많은 예술가와 교류할 기회를 누렸고, 축적된 작곡 실력을 토대로 더 높은 예술적 학습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자와 연구기관이 집적화를 통해 교류를 늘려가고 있지만, 흡수역량의 차이로 인한 비대칭적 학습은 이와 비슷하게 더욱 빈번해질 수 있다.
최근, 협력연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예산 투입량이나 정량적인 성과 지표 외에도 협력의 ‘주도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협력을 주도한다는 뜻을 흡수역량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파트너로부터 적극적인 학습을 이루어 미래에 또 다른 협력에서도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혁신생태계 속 융합과 집적이 고도화되는 오늘날, 파트너에 뒤처지지 않는 주도적 학습은 장기적인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 협력연구의 진정한 성공은 결국 내부의 흡수역량 축적에 달린 셈이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발간하는 ‘TePRI Report’ 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 구병석 KIST 미래전략팀 연구원
- 저작권자 2020-10-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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