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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이성규 객원기자
2020-07-23

실험실 실수로 탄생한 ‘라이거’ 물고기 인간과 쥐보다 진화적으로 더 먼 하이브리드종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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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8400만 년 전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각각 지구 반대편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해온 두 종의 물고기 사이에서 하이브리드 새끼 물고기가 탄생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미국에 사는 패들피시와 러시아 철갑상어로서, 얼핏 보기에도 전혀 다른 물고기처럼 확연한 차이가 나는 종들이다.

캐비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러시아 철갑상어는 전 세계의 강, 호수, 해안 지역에서 갑각류와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는 육식동물이다. 그에 비해 미국의 22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미국의 패들피시(주걱철갑상어)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고 산다.

러시아 철갑상어와 미국 패들피시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들이 수조에서 헤엄치고 있는 모습. ⓒ Flórián Tóth

그들의 마지막 공통 조상은 약 1억 8400만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이 두 종의 물고기는 지구 반대편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해 왔다. 진화적으로 따지면 인간과 쥐보다 거의 2배나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미국 패들피시의 정자와 러시아 철갑상어의 난자가 한 실험실에서 결합되었을 때 두 종 사이에서 잡종이 태어났다. 계통수(진화에 의한 생물의 유연관계를 나무 모양처럼 나타낸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들이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1억 8400만 년 전에 갈라져 독립적으로 진화

철갑상어와 패들피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살며, 가장 느리게 성장하는 민물고기 중 하나다. 또한 이 물고기들은 둘 다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 의하면, 패들피시의 경우 중국에서 멸종이 선언된 이후 생존해 있는 유일한 종이며, 철갑상어는 다른 종들보다 더 심각한 멸종 위기종이다.

특히 서식지 손실, 남획, 오염 등으로 패들피시와 철갑상어는 지난 세기부터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헝가리 수산양식연구소의 아틸라 모자르 박사팀은 포획한 상태에서 두 종의 물고기를 번식시키려는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진이 택한 방법은 정자핵의 관여 없이 정자에 의해서 난자의 발육을 자극하는 ‘자이노제네시스(gynogenesis, 난자단독발생)’였다. 즉, 패들피시의 정자를 사용해 철갑상어 난자의 발육을 자극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a는 러시아 철갑상어, d는 미국 패들피시, b와 c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들. ⓒ Kaldy et al., Genes 2020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연구진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정자와 난자가 실제로 융합되어 패들피시와 철갑상어의 유전자를 모두 가진 자손이 탄생한 것. 수백 마리의 하이브리드 종들이 태어났는데, 그중 약 100마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 이 새끼 물고기들에게는 ‘스터들피시(sturddlefish)’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새끼들은 모두 엄마인 철갑상어의 입 모양과 육식성 식욕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빠인 패들피시의 지느러미와 코 모양을 한 일부 개체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8마리의 스터들피시에 대해 DNA 분석을 실시한 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 그룹의 스터들피시는 어미로부터 DNA를 두 배나 더 얻어 패들피시보다는 철갑상어와 훨씬 닮아 있었다. 나머지 한 그룹은 거의 동일한 양의 DNA를 모계와 부계로부터 이어받아 이 두 종의 완벽한 잡종 물고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는 유전학 분야의 국제학술지 ‘진Genes)’ 5월호에 발표됐다.

진화 속도가 극도로 느린 화석 물고기들

이번 연구를 진행한 아틸라 모자르 박사는 “우리는 절대로 이 두 종의 교배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하이브리드 종이 탄생한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철갑상어와 패들피시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 덕분에 ‘화석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생태학적으로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서로 교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두 종의 물고기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비슷한 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패들피시와 철갑상어는 신체 구조 및 생리학적인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두 종 모두 비늘이 없는 피부와 나선형의 판막 창자, 그리고 연골로 된 내골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통점은 두 종이 독립적으로 진화한 후에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1억 8400만 년은 이 물고기들에게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미국 니콜스주립대학의 해양생태학자인 솔로몬 데이비드 박사는 “화석 물고기로 불리는 이 두 종의 물고기들은 진화 속도가 극도로 느리다. 때문에 우리에게 긴 시간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 기간이 이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모자르 박사팀은 자신들이 탄생시킨 스터들피시를 계속 돌볼 계획이지만, 새롭게 탄생시킬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거,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와 같은 하이브리드 종들은 새끼를 낳을 수 없으므로 스터들피시 역시 캐비아 생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많은 스터들피시의 탄생은 야생 물고기의 개체 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성규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저작권자 2020-07-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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