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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미국(애틀란타) = 권영일 통신원
2015-08-11

세계 표준시의 기원은 미국 철도 북한 표준시 변경을 계기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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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폰다 (Henry Fonda), 그레고리 펙 (Gregory Peck) 등이 출연한 서부영화 ‘서부개척사(How the west was won : the civil war)’. 이 영화는 서부와 동부, 남북전쟁을 거치며 남부와 북부가 하나의 미국으로 통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4번 째 에피소드인 ‘철도(the Railroad)’는 19세기 중반 미국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던 시대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철도가 들어오기 전 대륙횡단에 소요되던 시간이 6개월이었다면, 철도 개통 후 그 기간이 단 6일로 줄어들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철도가 들어오기 전 대륙횡단에 소요되던 시간이 6개월이었다면, 철도 개통 후 그 기간이 단 6일로 줄어들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 ScienceTimes
철도가 들어오기 전 대륙횡단에 소요되던 시간이 6개월이었다면, 철도 개통 후 그 기간이 단 6일로 줄어들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 ScienceTimes

옛날사람들은 태양이 가장 높게 떠오른 시간을 정오로 정해 자신들의 사는 지역의 기준시간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는 수 많은 태양정오시간(자오시간)이 생겼다. 자연히 시간의 통일성을 가질 수 없었고, 이동수단의 제약으로 서로 다른 지역과 시간을 통일할 필요성도 느끼지도 못했다. 철도의 출현으로 이 세계관은 무너졌다. 먼 지역에서 적용되는 ‘다른 시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광할한 영토의 미 대륙에서는 더 절실하게 ‘시간의 통일’이 필요했다.

철도 회사 소유한 시간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된 해는 1869년. 캘리포니아 주의 세크라멘토에서 네브래스카 주의 오마하를 잇는 길이 2826km(1756마일)의 철도이다. 만약 3000km 밖에서 출발지의 시간에 맞춰 달리기 시작한 열차가 품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출발지의 시간인가? 아니면 중간 도착지의 시간인가? 최종 목적지의 시간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표준시가 정착되기 이전의 역에 가보자. 각 역에는 오늘날 호텔처럼 여러개의 시계가 걸려있다. 그런데 시계 밑에 붙어있는 명찰에는 서울, 뉴욕, 베를린, 파리 같은 지역명이 쓰여져 있지 않다. ‘이리 앤 래커워너’,  ‘뉴욕센트럴 레일웨이’,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등 철도회사 이름이 붙어 있다.  결국 시간은 철도회사의 소유였고, 철도 회사의 수만큼 많은 시간이 존재했다.

당시 미 대륙 철도역에서 “지금 몇 시지요?” 라고 묻는 다면 대답하는 사람은 한참 망설인다.  각기 다른 여러 시간들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대답했다가는 시간을 물은 사람이 열차를 놓치기 십상이다. 역에 들어선다는 것은 여러 시간이 미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870년대 펜실베니아 철도 회사는 필라델피아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하고 자신이 운행하는 노선의 역들에 이 기준시간에 따른 시간표를 배포했다. 반면 ‘뉴욕센트럴 레일웨이’는 그랜드 센트럴 역의 ‘밴더빌트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했다. 이 두 회사는 근접한 지역에서 영업을 했는데도 통일된 열차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다. 만약 여행자가 피츠버그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할 경우 이 갈아탈 시간과 함께 어느 회사에서 운행하는 열차인지도 알아야 했다.  어느 한 회사의 시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다른 회사의 시간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시간의 혼란은 미국의 철도망이 점점 더 확장될수록 더 심각해 졌다. 대륙이 넓은 만큼 경도차가 커졌다. 이것은 시간차가 그만큼 더 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자연히 중구난방인 시간들을 하나로 묶자는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미국철도연합은 이에 따라 1883년 4월 8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제1차 ‘시간총회’를 열었다. 철도연합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미국의 철도회사들이 모여 만든 이익단체 성격의 협의체다. 세인트루이스 역은 14개의 노선이 운영되는 곳이다. 어디에서 오든 극심한 시간의 혼란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회의에 참석한 50여명의 간선철도 경영자들은 자신의 회사들이 사용하는 50여개의 시간 표준 종류를 4개로 줄이는데 합의했다. 미국 철도여행자들은 더 이상 역에 들어서자마자 혼돈으로 몰아넣는 시간들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드 플레밍 '잃어버린 16시간'

그렇다면 세계 표준시는 어떻게 제정됐을까?

1884년 10월 13일 드디어 세계 표준시가 채택됐다.  ⓒ ScienceTimes
1884년 10월 13일 드디어 세계 표준시가 채택됐다. ⓒ ScienceTimes

1876년 7월의 어느 날.  고향인 아일랜드를 찾았던 한 신사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가 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곳은 밴도란이라는 작은 시골역. 아일랜드 간선 철도노선 가운데 하나인 런던데리와 슬라이고를 연결하는 노선에 있는 역이다.

오후 5시 35분차를 타기 위해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서있던 이 신사는 열차 도착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승강장에 자신이 혼자 서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도착시간이 지나도 열차는 오지 않았다. 철도 여행자들의 필수품인 ‘아일랜드 철도 여행자 가이드’를 꺼내 다시 읽었지만 분명히 '런던데리행 열차 밴도란역 5시 35분'이라고 써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심지어는 역의 안내판 조차도 5시 35분 기차가 맞다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이날 그는 열차를 탈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런던데리항에서 출발하는 배까지 놓친 것은 물론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샌포드 플레밍(Sanford Fleming, 1827-1915)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철도와 관련된 시간의 모든 것들, 특히 세계 표준시를 제정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밴도란발 5시 35분 열차는 오전 5시 35분발이었다. 밴도란역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아침에 열차가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5시 35분발 열차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역의 시계에도 안내판에도 12까지 표시된 숫자에서 오전과 오후를 나누지 않은 덕에 플레밍은 16시간을 아일랜드의 시골역에 갇혀있었다.

이 사건은 플레밍이 그 후 만들어낸 세계 표준시의 업적에 중요한 동기가 됐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1845년 캐나다로 이주해 국유철도의 주임토목 기사로 활동했다. 인터콜로니얼 철도(1967-1876), 캐나다 태평양 철도(1872-1880)의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이 후 플레밍은 기차역에서 ‘잃어버린 16시간’을 찾기에 나섰다.

왜 시간을 12시간으로 나눠 두 번 세는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같은 시간을 두는 게 얼마나 많은 실수를 유발시키는가? 인간이 12이상의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바보인가? 플레밍은 5시 35분을 17시 35분으로 바꾸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습 때문에, 혹은 착각으로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게 해주었다.

24시간 체계는 공공 기관에서 표준으로 채택됐고, 많은 혼란과 갈등을 사라지게 했다. 플레밍은 24시간 체계를 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대한 지역 시간들의 아성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의 첫 논문은 지역시간을 폐기한 다음 표준 시간대와 전 세계를 위한 보편적 시간을 결합하고, 경도를 시간과 연결 짓고, 24시간 단위의 시계를 도입하자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플레밍의 논문은 많은 사람들의 이해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세계 표준시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동서로 넓게 펼쳐진 캐나다 철도의 스케줄 시차 문제에 직면해 캐나다와 미국의 표준시 설정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

그는 1879년 1월 25일 캐나다 학회에 ‘절대시간(Absolute Time)’이라는 연구서를 제출한데 이어, 그 해 2월 8일 현재 사용되는 표준시 체계를 최초로 알린 ‘본초 자오선의 선택(The Selection of a Prime Meridian)’이라는 연구서를 발표했다.

지구를 경도에 따라 15도씩 나눠 24개 시차 구역으로 구별한 플레밍의 제안은 1884년 오늘 미국 전역에 도입됐다. 이는 다시 1884년 10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자오선회의(International Meridian Conference)’를 이어져 각국이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지정하는 데 동의했다.

' 영국이 기준이냐' 프랑스인의 반발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의 주제는 하나였다. 본초자오선, 전 세계 정오의 기준선이 되는 자오선을 어디로 설정해야 하는가?

일단 영국은 그리니치 표준시가 있었다. 이를 따르면 본초자오선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영국이 정한 기준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1884년 10월 1일 3주간의 일정으로 시작된 본초자오선 회의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었다. 어떻게든 그리니치가 세계 표준시의 기준으로 채택되는 것을 관철시키려는 영국, 그리고 이를 막고 파리 본초자오선을 세계기준으로 삼으려는 프랑스의 외교전쟁이 불꽃을 튀겼다. 이 회의에 참가한 19개국 대표는 이 외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야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중재

회의를 주최한 미국의 채스터 A 아서 대통령은 각국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서한을 보내 세계 표준시의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근대 상업의 일상 업무 면에서 많은 난관에 처하게 됐습니다. 각기 자국의 표준 자오선을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오늘 모인 까닭은 전신망과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기존의 어려움들이 더욱 심각해 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미국과 유럽의 여러 기업과 과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세계공통 자오선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의해 왔고, 세계 공통의 자오선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주에 걸쳐 지속된 본초 자오선 회의에서 최고 쟁점이된 그리니치 본초 자오선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외교적 발언이 만들어낸 파도 위에서 출렁거렸다. 플레밍은 "세계표준시는 반드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립안으로 "그리니치와 정 반대편인 태평양을 가르는 대척지점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설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대표인 루이스 러더퍼드의 설득력 있는 비판으로 그리니치에 대응하는 자오선을 포기했다.

“만약 그리니치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 본초 자오선을 만들면 런던은 한 낮에 날짜가 바뀌게 됩니다. 날짜를 변경해야 한다면 세계 최대도시의 한 복판에서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태평양 한복판이 더 좋습니다.”

지루한 회의와 협상과 표결 끝에 1884년 10월 13일 드디어 세계 표준시가 채택됐다. 지구상의 경도마다 창궐했던 각각의 지역 표준시들이 사라지고 하나의 시간 틀에 인류가 속하게 된 것이다.

미국(애틀란타) = 권영일 통신원
저작권자 2015-08-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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