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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넬 교수는 1967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이던 당시 펄사(Pulsar, 맥동변광성)를 발견해 천체물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이 공로는 그의 지도교수였던 안토니 휴이시에게 노벨상을 안겨줬지만 버넬은 수상하지 못했다. 학생이라는 신분, 더욱이 여학생이라는 사실이 문제된 것이다.
이 일화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여성에게 냉담한 사회적 일면에 희생된 과학자로 묘사하며 동정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휴이시의 수상은 정당했다고 이야기 하며 자신은 노벨상에 대해 아쉬움이 없다고 밝혔다. 이후 런던칼리지, 왕립천문대 등에서 활발한 연구를 펼친 버넬 교수는 개방대학교(Open University)의 물리학과 교수, 배스대학교(University of Bath)에서 자연과학대 학장, 왕립천문학회 회장 등을 거쳐 현재는 옥스퍼드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있다.
27일 연세대학교 과학관 지하의 한 강의실에는 버넬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오는 30일 열리는 제1회 한영 여성과학자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버넬 교수는 연세대학교 천문학과를 방문해 현재까지 여성과학자들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개선방안에 대해 강연을 가졌다.
“여성 천문학자를 기리며”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버넬 교수는 캐롤라인 허셜, 세실리아 패인, 베라 루빈, 레베카 엘슨 등 18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천문학자들이 걸어온 길과 업적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여성이었기에 더 많은 열정을 기울여야 했던 그들의 삶은 또한 여성이었기에 더 빛나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그 자신도 뛰어난 천문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구결과의 공을 오빠인 윌리엄 허셜에게 돌린 캐롤라인 허셜의 삶을 진술하면서 “이것이 당시 여성이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고 평했다. 캐롤라인 허셜은 여자라는 이유로 아무런 지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지만 윌리엄의 조수로 일하며 천문학에 몰두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가정적이고 내조적인 역할만을 요구받은 캐롤라인 허셜과는 달리 현대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여성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유연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버넬 교수는 “현재 영국에서 물리학과와 천문학과 학부생들의 20~25% 가량이 여성이지만 물리학과 교수 200여 명 중 여성의 숫자는 24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나마도 15년 전 2명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진 상황이다.
국제천문연합(IAU, 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이 조사한 국가별 천문학계 여성 비율은 아르헨티나가 35.2%로 가장 앞선 반면 영국과 한국은 각각 10%, 6%로 세계 평균치인 12.8%에도 못 미친다.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심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기성 연구자들에 대한 통계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포함하면 더 많은 숫자의 여성이 천문학에 몸담고 있겠지요. 하지만 여학생들이 공부를 마친 후 연구를 지속하지 않고 학계를 떠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버넬은 학생에서 교수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비율이 점점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녀에 대한 동등한 대우와 적극적인 대응, 그리고 문화적인 변화가 기반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여성 과학자 문제의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어 과학 분야에서 여성을 고무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공식적인 회의나 의회, 집회에서는 반드시 여성멤버를 포함하고 있다. 덕분에 왕립학회 회원 1천400여 명에 포함된 50명의 여성들은 남성회원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활동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또한 책, 방송, 잡지와 같은 미디어에 표현된 과학자의 모습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강화해 직업에서의 성 고정관념을 없애나가고 있다.
여성 과학자의 업적을 기리는 수상제도와 행사를 만들고 그들의 이름을 딴 길이나 건물을 세우는 등 여성 과학도의 의욕을 북돋기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버넬 교수는 “능력에 대해서는 여성과 남성이 전혀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며 여성의 시각이 가져다 줄 ‘다양성’이 과학이라는 학문에 많은 가능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연자리를 마련한 연세대 천문학과 이석영 교수는 옥스퍼드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여느 위대한 과학자들과는 달리 학생들을 일일이 챙겨주는 소박하고 따뜻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자신도 이제 여섯 살 난 손자를 둔 할머니라며 웃는 그는 “멋진 가족들을 두었다는 사실”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18년 동안 하루에 반나절씩 시간제로만 일했습니다. 그런 생활 덕분에 오히려 저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효과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학으로 학교생활 패턴이 달라질 때마다 자신의 연구 패턴도 달라질 정도로 자녀교육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등하교길에 함께 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등 그 와중에서도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덧붙여 버넬 교수는 시간제로 일했기 때문에 남자동료들에게 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받은 점을 유일한 아쉬움으로 꼽았다.
한 교수가 30여 년 전 펄사의 발견을 기리는 노벨상 수상자에서 제외된 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버넬 교수는 “노벨상을 받지 않은 것은 나에게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밝혔다.
“여학생이기 때문에 노벨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은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을 타고 온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내 연구가 더욱 주목받아 많은 상을 받았으니 더 좋은 기회였지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는 자칫 정체되기 쉽다. 또 그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고 여겨져 이후에는 오히려 수상의 기회가 적어진다. 버넬 교수는 펄사의 발견으로 지도교수 휴이시와 함께 프랭클린 재단의 미켈슨 메달을 받았다. 이 후에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쳐 오펜하이머상, 왕립천문학회에서 수여하는 허셜메달, 미국천문학회의 틴슬리상 등을 수상했으며 또한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버넬은 “노벨상 대신 많은 상을 받았고 덕분에 더 많은 파티를 즐길 수 있었으니 훨씬 즐거운 일이 아니냐”며 웃음을 지었다.
세계적으로 탁월한 천문학 성과를 배출하고 있는 연세대학교에 꼭 방문하고 싶었다는 조슬린 벨 버넬. 그는 강연장을 찾은 많은 학생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여라”고 조언하며 후에 과학도를 꿈꿀 어린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는 멋진 여성과학자가 되라는 당부로 말을 맺었다.
- 전혜리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6-03-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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