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거석 구조물의 기원과 목적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매혹시켜온 영국 윌트셔(Wiltshire) 주에 위치한 고대 유적 스톤헨지(Stonehenge)는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뜻으로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거대한 유적을 남겼는지, 이처럼 거대한 돌이 어떻게 한 장소에 모여졌는지 밝혀지지 않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진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1,500년 동안 5단계에 걸쳐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여러 세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변화와 추가가 이루어졌다. 이 거대한 원형 구조물은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그 정확한 목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종교적 또는 천문학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일부는 이곳이 치유의 장소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조상을 기리는 장소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비로운 거석 구조물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스톤헨지의 바깥 동그라미인 셰일 서클에 사용된 돌 하나의 무게는 30~50 톤이나 된다. 기중기와 같은 강력한 도구가 없던 당시에 이처럼 무거운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도 의문이며 뗏목이나 지렛대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육로와 해상로를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스톤헨지의 기둥은 웨일즈에서 왔다
지금까지 스톤헨지를 구성하고 있는 돌들은 말버러의 다운스 구릉(Marlborough Downs) 지역 혹은 웨일스 펨브룩셔(Pembrokeshire)의 프레셀리 힐스(Preseli Hills)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자그마치 천년 정도 거슬러 올라간다. 1136년 ‘영국 왕들의 역사’를 쓴 몬머스의 제프리에 따르면, 스톤헨지는 마법사 멀린의 군대가 아일랜드에서 훔쳐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초 지질학이 발달하기 수 세기 전의 일이지만, 스톤헨지의 돌이 외국에서 채취되었다는 제프리의 이론은 당시 자그마치 4,000년이 넘은 유적지를 또 다른 신비로운 음모론의 중심에 휘말리도록 만들었다. 최소한 중세 연대기 작가는 해당 돌들이 지역에서 자급된 것이 아닌, 다른 먼 지역에서 왔다는 무언가를 알아챈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제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신화도 각색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8백 년이 지난 1923년, 웨일스의 지질학자 헨리 허버트 토마스는 스톤헨지의 청석들이 웨일스 펨브룩셔의 프레셀리 힐스에서 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마법이 아닌 인력으로 돌을 옮겼고 아일랜드에서 훔친 것이 아니라 웨일스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현대의 지질학자는 과학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추론을 시작했다.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고고학 연구소 마이크 파커 피어슨 교수 등이 이끄는 연구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톤헨지의 백운석, 유문암, 화산재, 사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기둥 ‘블루스톤’은 웨일즈의 특정 암석 노두인 카 고독과 크레이그 로시 펠린과 비슷하여 기원전 3,000년 이전에 펨브로크셔 해안 근처의 바람이 부는 언덕 위(Waun Mawn이라고 불리는 곳)에 처음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해당 돌들은 225km 이상 떨어진 웨일즈 서부에서 공급되었으며 이에 스톤헨지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2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돌을 채석한 석축으로 구성된 유물로 남게 되어 매우 이례적인 사례를 남겼다.
연구팀은 또한 프레셀리에 도착한 후 노두(outcrop: 기반암 또는 지층 내부 광맥이 지표면에 드러난 지형 혹은 암석)를 발굴했고, 그곳에서 석재 채석 도구인 돌 쐐기와 망치돌의 증거를 발견하여 이곳이 실제로 석기 시대 채석장이었음을 확인했다. 고고 식물학자 엘렌 시몬스은 기원전 3,400년경부터 사용된 탄화된 나무와 헤이즐넛을 발견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두 곳에서 채석했다는 증거를 확인하게 된다.
이후 중앙의 제단석은 기둥과 다른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이 돌 역시 같은 지역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웨일스 애버리스트위스 대학의 닉 피어스 교수를 포함한 연구진은 제단 석이 웨일스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정확한 출처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스톤헨지를 구성하고 있는 돌들의 고향이 다르다: 제단석의 진정한 고향
최근 호주 커틴 대학교의 연구팀이 주도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톤헨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6톤 무게의 제단석은 이전에 생각했던 웨일스 남서부 혹은 잉글랜드 남부가 아닌 스코틀랜드 최북단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웨일스 출신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앤서니 클라크가 이끈 이 연구는 제단석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 조각들의 화학적 구성을 분석하고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마치 지문과 같이 각 지역의 암석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커틴 대학교의 클라크 연구팀은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암석 ‘지문’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제단석의 구성과 가장 잘 일치하는 지역을 찾아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케이스네스(Caithness), 오크니(Orkney), 모레이 퍼스 (Moray Firth) 지역을 포함하는 오르카디안 분지의 구적색 사암(Old Red Sandstone)이었음이 밝혀졌다.
새로운 발견의 의미
먼저 스톤헨지와 스코틀랜드 최북단 사이의 거리가 약 700km에 달하기에 과거 기념물 건설에 사용된 돌 중 가장 긴 이동 거리로 기록되게 된다. 잉글랜드 남서부 솔즈베리(Salisbury) 근처에 위치한 이 고대 기념물이 실제로는 ‘영국’ 전역의 돌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스톤헨지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돌들의 고향이 각기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발견은 스톤헨지의 건설이 과학자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협력 프로젝트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견은 신석기 시대의 영국이 이전의 증거들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결되고 발전된 사회였음을 암시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국이 4개의 국가로 분리되지 않았을 터이니 다른 나라의 돌을 가져다 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연결되어 있었고, 매우 잘 조직되어 있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700km나 되는 거리에서 6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을 운반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기술력과 조직력을 새롭게 평가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당시 영국 전역의 다양한 공동체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으며,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신석기 시대의 영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발전된 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이제 다음 미스터리에 집중한다
이번 발견으로 인해 많은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그 거대한 돌을 그토록 먼 거리에서 운반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연구진들은 이제 이 ‘다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이번 발견은 신석기 시대의 다른 기념물들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 전역에 걸쳐 있는 다른 선사시대 유적들의 돌들도 이와 유사하게 먼 거리에서 운반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 사용된 첨단 분석 기술은 고고학 분야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암석의 화학적 구성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는 능력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의 정확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앞으로 더 많은 고대 유적들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특히 오래된 가설들을 검증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해당 연구 바로 가기 - "A Scottish provenance for the Altar Stone of Stonehenge (스톤헨지 제단석의 스코틀랜드 유래), Clarke et al. 2024"
- 김민재 리포터
- minjae.gaspar.kim@gmail.com
- 저작권자 2024-08-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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