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수업시간이나 강연회에서는 너도나도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부지런히 타이핑을 치는 것이 흔한 풍경이다. 교수와 발표자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적을수록 내용에 대한 이해도 높아질 거라는 믿음에서다.
그러나 녹취록 수준의 필기를 하는 것보다 느릿느릿 손으로 적는 편이 이해력과 성취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와 UCLA의 공동연구진이 65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다.
강연을 듣고 필기를 하되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치는 그룹과 손글씨로 받아적는 그룹으로 나누자 손으로 적은 학생들의 시험 점수가 훨씬 높았다. 자신이 필기한 노트를 다시 훑어보게 한 후 재시험을 치러도 결과는 동일했다.
강연자의 말을 아무리 정확하게 받아적어도 이해력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타이핑 작업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는 학술지 ‘심리과학(Phychological Science)’ 최근호에 게재되었다. (원문 링크)
손글씨 vs 타이핑, 어느 쪽이 이득일까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리튼(Sir Edward Lytton)은 1839년 저술한 희곡 ‘리슐리외(Richelieu)’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t the sword)”는 명언을 만들어냈다.
소통이나 협상을 할 때는 직접적인 폭력을 쓰는 것보다 문학이나 문화처럼 유화된 방법을 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이 말이 사실이라. 위대한 인물의 통치 하에서는 펜이 칼보다 강한 법이다.(True, This! 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고 되어 있다.
이제는 펜을 칼이 아닌 컴퓨터와 비교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노트북 컴퓨터가 가벼워지고 텍스트 프로그램이 다양해지면서 볼펜이 아닌 타이핑으로 필기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펜과 컴퓨터 중에는 어느 것이 더 강할까고 말해야 할까. 필기를 할 때는 손글씨로 노트에 직접 쓰는 것과 타이핑을 쳐서 입력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2007년 케빈 야마모토(Kevin Yamamoto) 남텍사스 법과대학 교수는 ‘수업 중 노트북 사용 금지는 과연 가치 있는 잔소리일까(Banning Laptops in the Classroom: Is it Worth the Hassles?)’라는 논문을 학술지 ‘법학 교육 저널(Journal of Legal Education)에 발표했다. 노트북 사용은 집중력을 분산시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담았다. (원문 링크)
반면 노트북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2006년에는 학술지 ‘교육 기술 연구 저널(Journal of Research on Technology in Education)’에 수업 중 노트북 사용을 옹호하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원문 링크) 커다란 강의실에서는 무선랜 기능을 갖춘 노트북이 큰 효율을 발휘한다는 내용이다.
2008년에는 경영학 수업에서도 노트북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논문이 학술지 ‘교육 리더십 학회지(Academy of Educational Leadership Journal)’에 발표되었다. (원문 링크)
실제로는 타이핑보다 손글씨가 이해력 높여
최근에는 타이핑을 치는 것보다 손글씨로 직접 필기할 때 내용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실험결과가 도출됐다. 논문의 제목은 ‘펜이 키보드보다 강하다 : 노트북보다 유리한 손글씨 필기(The Pen Is Mightier Than the Keyboard: Advantages of Longhand Over Laptop Note Taking)’다.
논문의 저자인 팸 뮬러(Pam Mueller) 프린스턴대 연구원과 대니얼 오픈하이머(Daniel Oppenheimer) UCLA 연구원도 동일한 의문을 품었다. 노트북 타이핑과 손글씨 필기를 함께 사용하다 학습 효율이 떨어지기도 하고, 회의 중에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받아적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이들은 65명의 대학생들을 모집해 실험을 진행했다. 유명 강연 서비스 ‘테드(TED)’에서 15분 분량의 동영상 5개를 선정해서 이를 보여주고 강연 내용을 필기하도록 했다.
필기 방법은 타이핑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키보드가 달린 11인치 노트북과 대학생용 공책 중에서 고르도록 했다. 부수 기능이 집중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컴퓨터는 인터넷에 접속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필기 후 학생들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인더스 문명은 대략 몇 년 전까지 존재했는가” 등 사실 기억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과 스웨덴은 사회 내 평등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다른가” 등 개념 활용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사실기억 관련 질문에는 노트북 타이핑과 손글씨 필기가 비슷한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개념활용 관련 질문에는 손글씨 쪽이 훨씬 높은 성적을 보였다.
연구진은 그 이유를 ‘축어’에서 찾았다. 축어는 녹취록처럼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는 것을 뜻한다. 노트북을 사용한 학생들의 필기 내용에는 더 많은 글자가 담겨 있었고 축어가 반복되는 경우도 많았다. 열심히 타이핑으로 받아적은 덕분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기록한 축어가 반복될수록 내용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받아적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손글씨로 필기를 하게 되면 전체 내용을 받아적을 수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에 따라 판단해서 기록으로 남길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적는다. 정보를 선별하고 처리하는 이러한 과정 중에 이해력이 높아진다. 노트북 타이핑을 허락하되 축어 반복을 피하라고 시키자 내용 이해도가 높아졌다.
더 놀라운 점은 일주일 후 자신이 기록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게 한 뒤 재시험을 치렀는데도 결과가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녹취록 수준으로 세밀하게 받아적은 학생들은 재시험에서도 여전이 성적이 뒤쳐졌다.
뮬러 연구원은 심리과학협회(APS) 발표자료를 통해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받아적는 태도보다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처리하는 편이 이득”이라며 “필기를 할 때는 노트북과 공책 등 매체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떠한 전략과 방법을 사용할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임동욱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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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5-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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