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논리는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웠을 때부터 시작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모택동은 곧바로 중국 역사의 정리를 학자들에게 주문했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탄생한 것이 통일된 중국 강역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의 범주를 확정해야한다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하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와 그 이외의 민족(혹은 그 국가)의 관계는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중국 국내’의 문제이지 ‘국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은 한족을 제외하고도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에 국가는 어느 하나의 민족만을 대변할 수 없으므로 여러 민족을 통일적으로 대변한다는 논리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수긍이 가는 일이다. 한족의 역사만을 중국사로 취급하면 몽고족이 세운 원(元)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靑)은 중국사에서 빠지게 되고 중국역사에 단절이 생기는 모순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어느 민족을 중국사에서 제외시키고 한족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면 중국사가 한족과 주변민족의 전쟁사로 점철되었던 만큼 과거의 적대관계만 부각된다는 것도 틀림없다.
그러므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따라 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중국 국민으로 되어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포함시킨다면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13번째로 인구가 많은 조선족의 역사도 중국사에 포함되며 고구려사·부여사·발해사·고조선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논리도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다민족국가론은 중국이 처한 현재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설명하는 논리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도 중국에서 공산정권이 생긴 1949년도 이후에 일어난 급조된 논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인들은 ‘북방소수민족 세력의 궐기’라고 부르는 5호16국(五胡十六國)의 대부분이 북방기마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중국인들은 북방기마민족을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의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큰 틀에서 흉노(匈奴)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고구려가 북방기마민족의 맹주였다는 것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 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중국과 당당히 맞섰다는 중국의 사료로부터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흉노는 중국과 대립하던 제국의 명칭으로 영토만 보더라도 중국의 3배에 해당하는 거대 제국이었다. 흉노의 수장을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이는 중국의 천자와 같은 격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왕은 중국의 오나라 손권이 선우라 불렀을 정도로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 통치하고 있는 강국이었다. 중국이 오·위·촉으로 분리되어 한치도 알 수 없는 전쟁의 와중에 있을 때 오나라의 황제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 8년(234, 재위 227∼248),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로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도 함께 보냈다.
물론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 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하였다. 그러나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등 수모를 받으면서 고구려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 즉 중국의 황제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고 유달리 집착하는 것은 중국 내에서 한민족의 특수성 때문이다. 현재 중국과 역사 문제로 시끄러운 소수 민족은 몽골과 한국 단 두 나라 뿐이다. 이들이 다른 소수 민족들과 다른 점은 중국 영토가 아닌 독립국가가 모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서 몽골은 오히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몽골의 영토가 방대하지만 인구가 고작 250만에 지나지 않고 경제력도 중국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인구는 남북한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약 8천만 명이나 되는데다가 경제력도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다. 특히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때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중국에 살고있는 한민족에 대한 파급효과가 크게 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복합적인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키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역사는 농경민과 유목기마민족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유럽은 기마민족 훈의 침입에 따른 민족대이동이 일어나 현재 서유럽의 국경 대부분이 이루어졌고 중국은 북방기마민족인 흉노와의 혈투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 내내 북방기마민족과의 싸움으로 일관했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적어도 북방기마민족만은 자국민이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이북에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독립된 국가세력이 있었고 중국은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중국의 현 영토를 근거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인들이 이민족이라고 규정했던 북방기마민족이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표면으로 부상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중국이 서술한 수많은 자료들이 근거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료들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밑바탕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사료들에 대한 방증자료를 과학으로 풀어 가는 ‘역사과학연구원(가칭)’과 같은 연구기구의 설립도 시급하다. 첨예한 고구려사의 왜곡 문제를 과학으로 풀어갈 때 해결책은 예상보다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