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外科, surgery, chirugia)라는 단어의 뜻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손, 기계를 사용하는 치료의학’으로 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외과라고 하면 ‘수술(手術)’을 연상하는데, 이 역시 손을 쓰는 치료기술이라는 말이다. 외과의 발달은 인류의 과학문명발달의 선두주자인 전쟁무기의 발달에 비하여 대단히 늦고 지루한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14세기에 이르러, 서구에 닥친 화약의 사용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으며,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화약의 사용으로 인한 대량살상은 전투외과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살상의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신성시 되던 혈액, 장기 등이 보통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되는, 즉 육체내부 노출로 인간의 몸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출혈과 총상에 대하여 인두로 지지거나 끓는 기름을 붓는 전래의 치료법이, 압박 또는 혈관결찰 등 합리적인 기술로 바뀌게 되며, 지혈제도 차츰 덜 독한(부식을 덜 시키는) 약제를 사용해, 인체에 해를 덜 끼치는 방법으로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15세기를 지나며 서서히 교회의 힘이 약화되고 중심이 인간 쪽으로 옮겨지면서, 인체해부가 허용되고 인체에 대한 흥미가 더욱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체에 대한 새로운 흥미는 르네상스 미술의 섬세한 인체 표현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여러 삽화 및 상상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와 연구는, 1543년 발간된 해부학책( 「De humani corporis fabrica by Vesalius」) 으로 대표될 수 있다.
노예인 검투사를 치료하던 갈렌(Galen, 130-201)의 신분에서 짐작하듯이 과거의 외과의의 신분은 대체로 내과의사보다는 하층계급이었다. 갈렌은 비록 내과와 외과를 확실히 분리시킨 시조로 알려져 왔지만, 오히려 분리된 후 외과는 해부학적 지식의 결여로 인기가 없는, 천한 기술로 전락하였다. 13~4세기 유럽 각국에 의과대학이 생긴 후에도 대학정식과목이 못되고, 체계적인 지식이 없이 경험적인 치료를 하는 직종이 되고 말았다.
영국의 경우는 16세기에 외과와 이발사가 분리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공인된 외과의사학회를 만들게 되었다. 따라서 조합의 직공처럼 도제 제도를 통한 교육이 주류를 이루었고, 몇몇 특수한 대학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의과대학에서 외과의를 교육·양성 하게 되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소위 계몽의 시대라고 불리는 18세기는 의학에서는 병리학과 실험외과가 시작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Padua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모르가니(Morgagni)는 임상증상은 부검소견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해 왔으며, 병리학교과서의 원조인『On the seats and causes of diseases investigated by Anatomy』(1761)를 발간했다.
물론 이 시대는 뉴턴(Newton)의 만유인력의 시대이기도 하며, 정치적으로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시대, 예술적으로는 로코코 시대에 해당되며, 외과도 차츰 과학, 학문의 길로 들어서는 시기이다. 그러나 아직 마취제도, 무균소독법도 모르던 외과로서는 암흑시대였으며, 오늘날 가볍게 치료되는 단순한 창상에도 쉽게 사망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근대 및 현대외과의 역사
19세기는 전세계 10억이 넘는 인구를 지탱할 만큼 식량생산도 늘어났고,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대량생산의 기초가 된 산업혁명이 꽃을 피웠던 시기이다. 예술적으로도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시작되어 인상주의까지 나아간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이 발표되고, 세계열강의 아프리카/아시아 정복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세계사적 변화의 진폭과는 달리 의학에서는 아직도 동통, 감염, 출혈 및 쇼크치료 등이 전혀 해결되지 못했고, 19세기 초의 수술이란 목숨을 건 최후의 수단으로 사망률이 95%에 달하였다. 마취제와 항생제가 없는 상태에서의 수술이란 오직 환자의 운과 외과의사의 빠른 손놀림에 운명을 걸고 시행되었다. 따라서 수술의 가장 큰 장애요인인 통증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에테르(Morton, 1848)와 클로로포름을 통한 전신마취법이 등장하자 이는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전신마취법의 개발이 현대외과의 시조인 것이다.
동통에 대한 마취제 사용이 쉽게 널리 퍼진 것에 비하면, 창상감염 대처방안은 참 지루하도록 늦게 개발되었다. 수술상처에서 고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성홍열, 패혈증, 괴저 등이 당연한 ‘병원증상(hospitalism)’이라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리스터(Lister)가 고름은 나쁜 것이고, 소독을 통해 예방할 수 있다고 하자 그는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미 프랑스의 화학자이며 미생물학자인 파스퇴르(Pasteur)가 식품, 포도주 등의 부패를 막는 방법을 고안하여 방부사업을 번창시켰으나, 이는 의학과는 관계가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리스터의 소독법과 무균수술법이 실시된 지 수십년이 지난 1890년에 와서야 수술용 고무장갑이 처음 사용되었으며, 거즈 마스크는 1900년에, 수술 전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는 간단한 개념조차도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확산되었다.
그러나 늦더라도 진보는 막을 수가 없는 법, 1826년 램버트(Lembert)에 의하여 개발된 장연결방법은 그때까지 금단의 장소로 알려진 복부와 장 수술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소장절제(1878), 담낭절제(1878), 위(1881), 위암(1883), 충수(1885)절제 등등이 그것이다. 이런 외과 수술기술의 발달과 함께, 외과생리학 연구의 진보로 외과학은 원시성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x-선의 발견(1895), 혈액형의 발견(1900), 화학요법, 항생제, 수혈, 수액, 영양, 내분비학 등등의 발전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외과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 신경외과, 흉부외과, 폐수술, 심장수술 등의 발전 모두가 20세기의 업적이다. 이들 발전에 비하면, 20세기 후반의 장기이식(신장 1954년, 간장 1963년)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외과의 마지막 성역이라던 심장도, 단순한 손상수선에서부터 선천성기형 교정, 허혈성질환 치료를 위한 관상동맥재건(bypass), 심장이식(1967)까지 진보하였다. 외과의 성역을 훨씬 넘어 다른 세상인 태아수술(1982)도 해리슨(Harrison)이 태아의 횡격막탈장을 교정함으로 실현되어 요즘은 태아진단 및 수술이 첨단의학이 되고 있다.
20세기 외과의 특징은 전문과목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마취과 등이 분리되어 연구·진료가 시행됐다. 공인 전문의 이외의 소아외과, 대장항문외과, 이식외과, 종양외과, 소화기외과, 혈관외과, 내분비외과, 내시경외과 등등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에서는 1899년 관립의학교(교장 지석영)의 외과를 최초로, 대한의원, 총독부의원, 경성 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외과 등이 진료와 연구를 했고, 해방 이후, 각 의과대학의 외과학교실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수료한 인재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식 외과 치료 방식이 도입되었다.
21세기의 외과
21세기의 외과를 상상함에 있어 현재의 첨단외과가 무엇인지, 현재 외과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현재 외과학 또는 의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현대 외과학은 ‘새로운 기술/발달이 느리다, 조기진단·조기치료가 필요하다, 의료비용이 부담스럽다, 치료/입원기간이 길다, 인체침습의 최소화가 필요하다’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내시경수술, 복강경수술, 로봇수술, 원격진료, 영상유도수술, 레이저 수술 등 신기술의 이용과 확산이 필수적이며, 나날이 늘어가는 교통사고 등에 대비한 외상치료기술의 진전 등이 필요하다. 또한 인공장기, 대용기관의 개발로 부족한 이식용 장기의 수요를 대치해야 하며, 면역거부반응 등 생리적인 방어기전에 대한 조정기술(modification techniques)도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새 분야에 따른, 전문과목의 변화 또한 당연하다고 본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