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남부에서 태어나 산업혁명의 영향 아래 있던 브라만트 지방에서 성장했다. 고흐는 세계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들의 기대와 다르게 중학교에서 콘스탄타인 호이스만스에게 드로잉을 배운 것 이외에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의 미술 선생님이었던 호이스만스는 파리에서 공부한 화가로 브라반트 지방의 풍경과 시골집의 가정을 즐겨 그렸다.
그는 대중을 위한 예술 교육을 주창했고, 미술 교사로서 주된 의무를 부지런히 연구하고 자주 모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신이 주신 자연을 관찰하는 능력의 배양을 강조했다. 훗날 고흐가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고 자연의 직접적 관찰에 기초한 예술을 옹호한 것은 호이스만스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고흐는 자연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던 바르비종파와 헤이그파의 그림에 깊이 심취했다. 바르비종파는 파리의 남쪽 부근에 위치한 퐁텐블로 숲의 바르비종 마을 근처에서 작업하며 자연을 묘사하는 전원 풍경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러한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들은 헤이그에 자주 모여 이야기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헤이그파라 불리었다. 오랜 정치적 전통이 유지되고 있던 헤이그에 풍족한 정부 관리들이 많았고, 그들은 자신의 풍족함을 예술을 후원하는데 쏟았다. 그 때문에 헤이그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 예술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또한 화가들은 경제 성장에 일익을 담당하던 유망한 기업가들에게 그림을 팔아 생계나 예술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흐는 헤이그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화풍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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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헤이그와 영국에서 지리와 건축을 공부했지만 그 영역을 넘어서고자 인간주의적 요소를 묘사할 수 있는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고흐는 벨기에 남서부 지역의 탄광 지대인 보리나주의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광산 건물과 폐탄 더미를 배경으로 팔다리가 앙상하고 초라한 몰골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고흐는 그에 앞서 확고한 기초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그리는 것보다 “좋은 것들을 모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공부했다.
고흐는 1880년대에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의미는 밀레와 사뭇 달랐다. 밀레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회적 악습을 비판하였다면, 고흐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밀레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고흐는 그 전부터 선교 활동에 참여하여 ‘신의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 되고자 할 정도로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고흐는 그의 작품에 산업화 이전의 풍경과 산업화 시대의 풍경을 함께 담았다. 네덜란드의 경우 19세기 중반부터 철도가 개발 및 발전함에 따라, 철도가 놓이면서 깎여 나가 황폐해진 곳이나 지평선에 공장 굴뚝이 보이는 동네가 많았다. 그러한 곳에 머물고 있던 고흐는 그 곳 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점점 산업화 되면서 발생하는 노동 활동이나 생산 활동을 화폭에 담았다.
주변 친구들이 고흐에게 석양을 배경으로 노동자 한 사람을 그리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냐고 충고하면, 고흐는 더 보기 좋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할 수 없다고 답하곤 했다. 고흐는 그의 그림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작업을 마쳤던 것이다.
1884년 초반에 고흐는 뇌넨에 위치한 직조공들의 작업장을 자주 방문하면서 보았던 상황을 30점 가량의 드로잉과 회화로 그렸다.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상황을 보았던 고흐는 산업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모습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괴물 같은’ 참나무 직조기가 지배하는 작업장을 묘사했다. 1884년작 <직조공의 작업장>을 보면, 직공은 아기를 맞은편에 둔 채 기계에 삼켜지는 듯한 모습으로 대개 무표정하고 어색한 모습이다.
또한 직조기는 바닥이 흙으로 된 초라하고 비좁은 방안에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로 놓여있다. 예술사가인 캐럴 제멜에 따르면, 고흐는 수공업자들의 마을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면서, 한편 실제로 뇌넨에서 현실적 빈곤을 목격한 후 모호한 상황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이념적 혼동 때문에, 고흐의 직조공 연작이 어색해 보인다는 것이다.
고흐는 약 900통에 달하는 그의 편지에서 밀레의 작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이외에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동생이자 화상인 테오, 누이 동생 빌, 주변 친구들에게 일상적인 관심사 혹은 자신의 그림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담은 편지를 썼다. 어느 시대에도 예술가들 중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야망과 성취에 관한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반면 고흐는 편지에 그의 그림, 주변 사람들 및 상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내용들을 자세하게 썼다. 예를 들어 고흐는 1880년 9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씨 뿌리는 사람>을 벌써 다섯 번이나 그렸어. ... 나는 그 인물에 완전히 빠져 있단다.”라고 적으며 밀레에 대한 그의 흥미를 말하였다. 실제로 자신이 죽기 전인 1890년 봄까지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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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묘사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고흐는 원근법 틀에 관심갖게 되면서 풍경화에 심취했다. 자신의 풍경에 대한 관심은 인물에 비해 10분의 1도 안된다고 말할 정도로, 고흐는 인물 특히 초상화 그리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러한 관심도 헤이그에서 가져온 원근법 틀을 만나면서, 그 기구를 이용해 빠르고 자신감 있게 풍경화를 그리는 것으로 변했다. 화가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하였던 원근법 틀은 팽팽하게 연결된 선과 그 선들이 만든 구멍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면서 수직과 수평의 기준선을 설정하도록 도와주었다. 고흐는 이 틀을 이용해 선으로 기초 구성을 한 다음 여러 가지 형태, 방향, 두께, 밀도를 표현하여 화폭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고흐는 전에 이루지 못했던 효과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유화를 사용하였다. 그는 드로잉을 ‘모든 그림의 바탕’이라고 생각하였지만 1882년 중반부터 수채 물감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고흐는 “내 성격과 기질을 고려했을때 수채 물감으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절반 밖에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고흐는 자신이 전에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점성이 강한 매체인 유화를 이용했다. 하지만 당시에 유화 가격이 비쌌던 까닭에 고흐의 재정적 상황에서 부담이 되었다.
고흐는 처음 유화를 배울 때 자연광 속에서 "색채들은 얼룩덜룩해지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안 후, 색채의 효과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어두운 실내에서 수개월동안 작업하던 고흐는 색채의 효과에 더 관심 갖기 시작했으며, 그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화학자인 미셸 외젠 슈브뢸는 <색채의 조화와 대비에 관한 법칙>이라는 글에서 색채의 상호작용에 대해 분석했다.
고흐는 이 글을 통해 색채 자체보다 그 색채를 둘러싼 주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색채의 상호작용을 보완하는 색채의 효과에 고심했다. 예를 들어 고흐는 “아주 엷은 노란색이라도 보라색이나 연보라색 옆에 있으면 진한 노란색처럼 보인다.”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고흐는 브라반트의 들판 곳곳에서 보색 대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봄에 분홍색과 녹색이, 여름에 주황색과 파란색이, 가을에 노란색과 자주색이, 겨울에 검은색과 흰색이 대비를 이루는 것처럼, 계절마다 많은 보색의 쌍들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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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흐가 의도한 색채의 모습은 고흐의 작품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테오가 보면 ‘너무 검다’라고 여길 정도로, 고흐는 짙은 색채 구도를 사용해서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들을 밝게 보이도록 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흐의 색채는 더욱 어두워졌다. 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고흐의 색에서 병적 징후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들은 40점이나 되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통해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거의 100여점의 작품을 완성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현재 전해지는 작품들 중에서 가짜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문헌에 따르면 오베르에서 완성된 작품의 양은 방대하다.
고흐는 매일 다섯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그리고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때 그려진 <오베르 교회>는 당시 그의 열정적인 생활 이면에 심리 상태를 잘 말해준다. 예를 들어 직선 대신에 이글거리는 선, 채도 높은 노랑색, 보색 효과를 드러내는 보라색이나 진한 코발트색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고흐는 자신의 불안정한 심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했다.
또한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자살의 표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글거리는 밑 밭 위를 검푸른 하늘이 짓누르고 음침한 한 무리의 검은 새떼가 낮게 날고 있다. 이러한 전경에 대해 고흐는 죽기 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지금 어지러운 하늘 아래 펼쳐진 밀밭을 그리고 있으며, 지독한 슬픔과 고독을 그리고 있다.”라고 썼다.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적으로 노랑과 파랑 및 녹색의 강렬한 보색 대비를 두고 슬픔, 고독, 분노의 표출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흐가 7월 말에 밀밭에서 자살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즉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전체적으로 슬프고 고독해 보이지만 음산한 하늘 아래 밀밭의 풍경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건강과 힘’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온갖 장애를 이기고 수확을 거두는 긍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가 거의 없었던 고흐는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던 방향을 묵묵히 진행할 수 있었다. 고흐는 알코올 중독, 매독, 귓병, 정신 착란 등 수많은 질병으로 고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조울증 환자이면서 하루 만에 그림을 끝낼 정도로 대단히 조급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그의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고흐는 그러한 상황에서 더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언제나 어느 화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가겠어. 사물에 대한 나의 인식, 내가 표현하려는 주제가 그런 태도를 분명히 요구하기 때문이야."는 말처럼 그림에 몰두했다. 고흐는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크게 웃고 있는 해바라기처럼 생명력 넘치게 자신의 일을 하며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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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展은 대가인 고흐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알찬 기회이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대기 순으로, 가난한 농민사회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은 초기 네덜란드 시기(1881-85)부터 시작해, 처음 인상파의 빛을 발견하며 화풍의 틀을 마련한 파리 시기(1886-88), 색채의 무한한 신비를 마음껏 구현한 아를르 시기(1888-89), 불타는 예술 혼을 자연 묘사를 통해 분출한 셍레미 시기(1889-90), 마지막 생을 장식한 70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관람객들은 고흐의 다양한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유화 45점, 종이 작품(드로잉과 판화) 22점 등 총 67점이 선보이는데, 45점의 유화 작품 중에 고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화상><씨 뿌리는 사람><아이리스><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등과 종이 작품(드로잉과 판화) 22점 중에 판화 작품인 <감자 먹는 사람들>도 선보인다.
고흐 작품의 절반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암스테르담)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오텔로)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소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불멸의 화가 고흐의 미술사적 세계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이 보았던 고흐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전 시 명: 불멸의 화가, 반 고흐 展
전 시 장: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기간: 2007. 11. 24 - 2008. 03. 16
문 의 처: 02) 2977-1533
사 이 트: http://vangoghseoul.com
- 공하린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8-01-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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