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 하버드대학 교정은 평소에 비해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날씨가 흐려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이야기는 여전히 들렸고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대학의 수장인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총장은 중요한 책들을 아내의 승용차에 빠짐없이 챙긴 다음 인연이 깊은 정든 교정과 이별해야 했다. 하버드 정문을 나오면서 서머스 총장은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이 배출한 대표적인 수재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대학 하버드. 작년 초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여러 가지 ‘망언’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던 서머스 총장은 계속 이어진 학교 내부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지난 2월 사임을 발표했다. 그리고 6월까지 학교를 떠나겠다고 이야기 했다.
서머스 총장이 학사일정이 마무리되는 6월 30일을 기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발표는 미국 전역에 화제가 됐다. 하버드가 미국의 가장 명문이긴 하지만 대학에서 총장이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여성은 과학, 수학에서 남자보다 열등” 구설수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서머스 총장은 하버드의 수장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올랐다. 특히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 때문이다. 그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이 출세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여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서머스 총장은 공개석상에서 여성이 과학과 수학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차이(biological difference)가 있기 때문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유전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주장 속에는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이라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은 最高며 最古다. 미국의 보수주의의 요람이다. 미국을 살찌게 한 실리콘 밸리의 스탠포드와는 전혀 다르다. 하버드 대학은 설립 이래로 여성 해방의 리더가 된 적이 없다. 대학이 추구하는 지성 속에 여성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최고의 명문이다.
하버드 대학은 원래 법과 정치로 유명하다. 유럽의 보수주의와 뉴 잉글랜드 풍(風)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는 곳이다. 그러나 미국의 첨단과학을 상징하는 하버드 천문대(Harvard Astronomical Observatory)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성이 천문대 망원경을 사용할 수 있었던 때는 1950년대 후반에야 가능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하는 여성들도 이때까지 망원경을 사용할 수 없었다. 대학 당국은 여성이 천문학을 전공하는 것조차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의 대학 입학도 1800년대 후반에야 가능했다.
서머스 총장은 한국 여성에 대한 비하발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그는 한 강연에서 “1970년대 서울 소녀들은 대부분이 창녀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의 산업화 노력을 도와 주어서 성공했기 때문에 소녀 창녀들이 없어졌다.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라는 이야기도 했다.
서머스 총장은 취임 이후 5년 만에 물러난 하버드의 최단기 총장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재임기간 동안 사망한 총장을 제외하면 최단명이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데는 그럴 듯한 변명이 없다.
서머스 총장은 인문과학을 중요시 여기는 하버드 대학에 국내 최대의 생명과학 연구소를 설치했다. 생명과학을 하버드의 중요한 프로젝트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독선적인 그의 행위는 일반 교수들의 미움을 샀다. 교수들은 불신임 결의안까지 제출했다. 그리고 일부 교수는 사표까지 냈다.
하버드 대학 학생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은 지난 2월 서머스 총장의 구설수와 관련, 그를 지지하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대학이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견하기 위해 있는 곳으로 새로운 생각이 불편하다고 배척해서는 안되며 서머즈가 한 말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두 명의 여학생과 한명의 남학생이 공동으로 쓴 글이다.
서머스 총장의 여성비하발언은 왜곡됐다는 주장이 많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언론이 불리한 부분만 발췌해 보도했다는 이야기다. 학생신문이 서머스 총장을 지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총장을 몰아낸 것은 대학 교수들이다. 학생신문은 총장편에 섰다.
지난 2월 사임을 발표한 이후 서머스 총장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도 언론도 없다. 하버드가 낳은 천재 서머스 총장은 아내가 몰고 온 승용차에 마지막 개인 소지품들을 싣고 하버드 교정을 떠났다. 그는 ‘미국을 움직이는 유태인들’ 가운데 중요한 사람이다. 대단한 천재라도 적이 많으면 좋지 않다.
- 김형근 편집위원
- 저작권자 2006-07-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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