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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권예슬 리포터
2023-09-08

원하는 길 따라 굴러가는 ‘말 잘 듣는’ 공 땅의 모양이 아닌, 자신의 형태에 의해 경로가 결정되는 입체 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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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연구진이 미리 설계한 경로를 따라 굴러 이동할 수 있는 물질을 만들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GettyImages

동그란 바퀴는 평평한 면에서 굴리면 직선 경로로만 굴러간다. 무게 중심을 바꿔 지면과 접촉하는 지점이 달라지면 회전하며 방향을 변경할 수 있다. 자전거처럼 두 개의 바퀴가 축으로 연결되면, 더 자유도가 적어진다. 외부에서 힘이 별도로 가해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평행한 직선 위를 달려갈 수 있다.

바퀴나 구슬처럼 간단한 모양이 아닌 특이한 모양의 입체 도형은 어떤 식으로 굴러갈까. 최근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 연구진은 원하는 경로를 따라 굴러 내려오는 고체를 디자인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그 연구 결과를 지난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복잡한 경로를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부터, 양자컴퓨터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까지 두루 응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찰흙 꾹꾹 누르듯 길 학습시켜

‘말 잘 듣는 공’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아래 그림처럼 비탈길에 미리 길을 그려두고, 각 길 위에서 찰흙을 눌러주면 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울퉁불퉁 독특한 모양의 공은 그려진 경로를 따라 비탈길을 굴러내려 온다. 학습시킬 수 있는 길이는 공의 표면적 정도다. 비탈길이 길다면, 이 공은 중력에 의해 학습한 경로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굴러 내려오게 된다.  <관련 동영상 보기>

▲ 비탈길에 길을 그려두고, 찰흙을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면 그려진 경로를 따라 굴러가는 울퉁불퉁한 공이 만들어진다. ⓒNature

여기에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경사면을 굴러가는 구체가 지구본이라고 상상해보자. 북극이 위에 있는 상태에서 경사면을 한 바퀴 굴러 내려왔을 때 북극은 다시 위를 향한다. 그러나 아시아, 유럽 등 대륙의 위치는 굴릴 때마다 매번 다를 것이다. 연구진은 북극이 위로 향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등 대륙의 위치도 초기 위치와 동일하게 정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연구진은 이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알고리즘을 만들고, 바닥이 아닌 자신의 형태에 의해 경로가 결정되는 물체를 ‘트라젝토이드’라고 명명했다. 이후 3D 프린터를 이용해 해당 모양의 공을 실제로 제작한 뒤 경사면에서 굴렸더니 예상했던 경로를 따라 구불구불 굴러 내려간다는 것도 확인했다.

 

정밀한 움직임 필요한 로봇부터 양자컴퓨터까지

트라젝토이드처럼 자신의 형태에 따라 이동 경로를 결정하는 입체 도형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굴러가는 ‘올로이드’나 ‘스피어리콘’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기존 개발된 도형들은 응용이 제한적이었다. 가령, 스피어리콘은 야구공의 솔기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따라 움직이는데, 계속 한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동 후 가장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중심으로 돌아온다. 즉, 자유자재로 움직임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 올로이드(왼쪽)와 스피어리콘(오른쪽)의 구조. ⓒWikimedia, Flickr

반면, 트라젝토이드는 이동 경로를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물을 피해 복잡한 지형을 탐색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 등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로봇 공학을 넘어선 응용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양자 컴퓨팅과 의료 분야에서도 쓰일 수 있다.

구체의 원자에서 전자의 고유한 운동량인 ‘스핀’은 어느 방향이든 가리킬 수 있다. 트라젝토이드 알고리즘을 원자에 접목한다면, 회전하는 원자(굴러가는 트라젝토이드)에서 스핀의 방향(트라젝토이드가 굴러가는 경로)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양자 컴퓨팅에서 양자 정보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양자비트)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의학 분야에서는 자기공명영상(MRI)에서 관찰을 방해하는 잡신호의 영향을 완화하는 데 응용될 수 있다. MRI는 강한 자기장으로 몸속 원자를 진동시키고, 이때 발생하는 전자기파로 몸속을 촬영하는 원리다. 스핀의 방향을 제어하면 즉, 자기장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면 유용한 신호와 잡음을 분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이번 연구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 8월 10일 자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Nature

논문과 함께 게재된 논평에서 헨리 세게르만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교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순수 기초과학 연구 덕분에 여러 분야에서 두루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며 “여러 유명한 응용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IBS 연구진이 풀어낸 알고리즘은 물체의 형태로 경로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통찰적인 해답을 제공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권예슬 리포터
yskwon0417@gmail.com
저작권자 2023-09-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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