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5일 세계의 이목이 중국에 쏠렸다. 중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 중령을 태운 ‘신의 배’라는 의미의 선저우(神舟) 5호가 발사되어 약 21시간 동안 지구 주위를 궤도비행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중국은 옛소련(1961년)과 미국(1962년)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유인우주비행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이 사건은 세계 최대 다목적 댐인 싼샤댐 건설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13억 중국인들의 민족주의를 한껏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이 명실상부한 과학기술의 강대국임을 전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주를 향한 천년의 꿈
로켓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화전(불화살)을 11세기에 발명한 중국의 우주를 향한 꿈은 14
세기에 완후라는 목수가 47개의 폭약을 매단 의자에 앉아 하늘에 닿고자 했던 천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중국의 우주비행은 캘리포니아 공대 출신의 천재적인 우주공학자 첸쉐센이 중국으로 귀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차대전 중에 미국 국방과학자문위원회의 고위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1950년대에 공산당원이라는 혐의로 인해 미국에서의 모든 연구기회 박탈과 가택연금까지 당하게 되자 1955년 중국행을 택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미국과 옛소련의 우주개발을 각각 진두지휘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과 세르게이 코롤레프처럼 첸쉐센 역시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은 그의 리더십 하에 1956년부터 옛소련의 로켓기술을 이전받아 시작돼지만 중소 관계가 냉각되면서 1960년에 이르러 소련은 협력관계를 단절한다. 그럼에도 1970년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량한 창정 1호 로켓에 실린 동팡홍(東方紅)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5번째로 인공위성 발사 국가의 대열에 합류한다.
유인우주계획은 1970년대부터 추진되었지만, 1960~70년대 문화혁명과 마우쩌둥(毛澤東) 사후 혼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부담 때문에 실용적인 로켓 발사체 개발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중국정부는 1985년에 국제 상업용 위성발사 시장에 뛰어들면서 3개의 위성발사장을 건립했다.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위성을 발사해준 덕분에 중국은 1985년에서 2000년 사이에 18번의 상업용 위성 발사를 수주할 수 있었지만, 미국정부가 기술유출과 발사비용 덤핑 등을 이유로 1990년대 말 중국의 위성발사사업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중단된다.
옆으로 밀려나있던 유인우주비행계획은 1992년에 유인우주계획인 ‘프로젝트 921’이 가동되면서 1993년에는 항공우주기술 연구의 중심축인 국가항천국(NRSC)이 설립되었다. 1994년 장쩌민 주석의 러시아 방문으로 양국간에 우주분야 협력서가 체결됨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우주인 훈련, 소유즈 캡슐, 우주복 등 유인우주비행 관련 기술이 이전된다.
귀환 캡슐의 회수실험을 목적으로 1999년에 발사된 무인우주선 선저우 1호부터 시작해서 원숭이, 개 등이 탑승해서 생명유지를 실험한 선저우 2호를 거쳐 2003년 선저우 5호에 이르러 드디어 세계 3번째로 유인우주비행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중국 우주개발의 역사에도 수많은 실패가 따랐지만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비밀주의로 인해 대부분 공개되지 않았다. 선저우를 싣는 로켓 발사체인 창정(長征) 시리즈는 81번의 발사에서 11번이나 실패하다가 2000년 이후에서야 100% 발사 성공률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95년에 TV 중계되던 창정로켓이 발사 실패로 근처 마을에 떨어졌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망자 수는 6명에 불과했다.
독자노선인가 아니면 협력인가
중국은 선저우 계획에만 약 2조 6천억 원을 쏟아 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인우주계획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61년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유인우주비행에 성공했을 때 옛소련은 자본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승리라며 떠벌렸다. 우주개발로 중국이 노리는 최우선적인 목표 또한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선전효과이다. 당시 무디스는 선저우 5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중국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유인우주비행은 무인인공위성에 비해 기술의 난이도가 한 차원 높기 때문에 첨단 분야 등 전반적 산업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또한 선저우 개발을 맡고 있는 중국 항공우주과학기술공사를 비롯한 3천여 개의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수만 명 과학기술인력의 예에서도 보듯이, 생산 활동과 고용창출이라는 경제적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울러 우주개발이 중국 내의 자원 감소, 환경파괴, 인구문제 해결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은 2번째 유인우주비행으로 올해 가을에 두 명의 우주인을 태운 선저우 6호를 발사할 계획이다. 이 6호를 시발로 7호와 8호를 포함하는 2단계 유인우주비행 계획에서는 우주유영과 도킹을 실험해서 2010년에 자체적인 우주정거장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 직전인 2007년 말, 달을 선회하는 무인위성 창어(嫦娥) 1호를 발사하고 2010년까지 중국 우주비행사의 발자국을 달에 남긴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그 후로도 2015년 달기지 건설, 2040년 화성유인탐사 등 야심 찬 계획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부푼 꿈을 바라보는 다른 나라들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특히 미국은 유인우주선 발사가 우주군사기술로 활용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2003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이 2010~2020년이면 우주공간을 이용한 미사일 공격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선저우 4호에는 전자전 장비가, 5호에는 고해상도의 정찰 카메라가 탑재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1997년 이른바 럼스펠드 보고서에서 신 우주전략을 발표하면서 21세기에는 우주를 지배해야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이 현재 국제우주정거장과 미사일 방어체제(MD, Missile Defense) 구축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특히 1999년 중국 로켓으로 미국 인공위성이 발사될 때 미사일 기술의 유출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정부는 인공위성을 무기로 분류해서 수출규제품목에 포함시켰다. 실제 우리나라 아리랑 위성의 경우 당초 중국 장성공사와 발사계약을 맺었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발사장소를 러시아로 변경해야만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우주협력에서 상대적으로 소원해왔다. 그런데 최근 2004년 12월 미국과 중국의 우주항공국 국장들이 사상 최초로 워싱턴에서 만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국의 우주개발이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국제우주정거장에 참여하려는 중국의 노력을 저지했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로 방향 선회를 하고 있는 듯싶다. 그렇다면 중국도 선뜻 국제우주협력의 파트너로 나설 것인가? 그 귀추가 주목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