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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학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012-08-28

‘정액의 비밀’ 연이어 밝혀져 여성 우울증 줄여주고 배란 유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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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정액을 마법의 물질로 여겼다. 남자의 정액이 자궁 속에서 응고되면서 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었기 때문.

따라서 남자의 정액이 집안에 복을 가져온다는 미신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남성을 유혹해 정액을 탈취해가는 여성 ‘정액 사냥꾼’들이 경찰에 검거된 적도 있다.

▲ 포유동물의 정액이 배란을 촉진하는 등 암컷의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1679년 안토니 레벤후크가 현미경으로 자신의 정액 속에서 꿈틀거리는 수백만 마리의 정자를 발견한 이후 연구가 거듭되면서 난자와 결합해 수정을 하는 주인공이 바로 ‘정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자는 정액의 약 5%만을 차지할 뿐이다. 그럼 정액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95%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정액은 난자로 가는 여행에서 정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운반체 역할을 하면서 정자가 운동하기 위한 에너지들을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액은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 자궁 내로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산성을 띠는 여성의 질 내부에서 정자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중화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액의 이런 기능에 대한 관점이 틀렸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즉, 정액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성의 건강에 대해 적극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

여성들의 암 억제하는 기능 지녀

정액의 새로운 기능 중 가장 많이 규명된 것이 여성들의 암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정액은 유방암과 난소암을 억제하며, 자궁경부암 바이러스를 없애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003년 정자를 제거한 정액에서 광물질인 아연 등 세 가지 성분을 뽑아내 실험한 결과 여성들의 난소암 세포를 죽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배석년 교수팀은 지난해 다시 정액에서 추출한 아연과 구연산 복합물질이 자궁경부암 바이러스를 없애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덴마크와 호주의 공동연구팀은 벌과 개미 등 사회적 곤충의 정액이 다른 수컷들의 정자를 죽이는 화학무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적 곤충은 한 마리의 여왕이 모든 수컷을 차지하므로 라이벌 수컷들끼리의 정자 전쟁이 그만큼 치열하다.

공동연구팀의 실험결과 사회적 곤충의 정액은 단 15분 만에 다른 수컷의 정자 50% 이상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최근 정액의 새로운 기능을 밝힌 두 건의 연구결과가 연이어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정액은 여성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애정을 증가시켜 주는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코르티솔 등의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또 갑상선자극 호르몬인 티로트로핀이나 멜라토닌 등의 항우울성 물질도 들어 있다.

뉴욕주립대학 연구진은 정액에 함유된 이 같은 물질들 때문에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여성들의 경우 그렇지 않는 여성들보다 우울증세가 더 적게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 하에, 여성 293명을 대상으로 성생활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가설대로 피임기구 없이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여성들의 경우 피임기구를 사용하는 여성 및 평소 거의 성관계를 맺지 않는 여성들보다 우울 증세가 상당히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결과는 ‘성적 행동의 연구 기록((Archives of Sexual Behaviour)’이란 학술지 최신호에 실렸다.

정액에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는 배란유도인자 존재

한편, 포유류의 정액이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운 연구결과도 최근 미국 학술원 회보(PNAS)에 발표됐다.

▲ 라마 수컷의 정액을 라마 암컷의 뒷다리에 주입한 결과 성적 자극이 없어도 배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은 낙타와 근연관계에 있는 라마의 모습. ⓒmorgueFile free photo
대부분의 포유류 암컷은 인간 여성처럼 성적 활동과 무관하게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난자를 배출하는 ‘자발적 배란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토끼나 고양이, 낙타와 같은 일부 동물들은 배란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성행위에 반응하여 살아 있는 난자를 배출하는데, 이를 ‘유도적 배란자’라고 한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유도적 배란자’의 경우 교미로 인해 성기에 가해지는 물리적 자극이 암컷의 호르몬 반응을 촉발해 난자를 생성·배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1985년 중국의 연구진이 ‘유도적 배란자’ 동물의 수컷 정액에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는 배란유도인자(OIF: ovulation-inducing factor)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너무 파격적이어서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캐나다 서스캐처원 대학의 그레그 애덤스 박사팀에 의해 ‘포유류의 정액 속에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는 OIF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애덤스 박사가 이 같은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5년부터였다. 당시 그는 낙타와 근연 관계에 있는 라마 수컷의 정액을 라마 암컷의 뒷다리에 주입한 결과 성적 자극이 없어도 배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후 애덤스 박사팀은 정액 속의 어떤 물질이 OIF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7년 동안 다양한 사이즈의 필터를 이용해 정액으로부터 효과분자를 걸러내는 작업 등을 반복하면서 매 작업단계를 거칠 때마다 처리된 정액을 라마 암컷의 뒷다리에 주입하여 배란을 일으키는지 확인하며 OIF 후보의 범위를 좁혀 나갔다.

그 결과 드디어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는 신비의 물질을 밝혀냈다. 그 신비의 물질은 다름 아닌 1980년대 초반 황소의 정액에서 처음 발견된 바 있는 ‘신경성장인자(NGF: neural growth factor)’인 것으로 밝혀졌다.

NGF는 많은 포유류 종들의 체내에 존재하는 흔한 분자로서, 발견 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그것이 수정 및 임신의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물질이다.

애덤스 박사팀은 다양한 포유류의 정액을 분석하여 인간을 포함한 거의 모든 포유류의 정액 속에서 NGF를 찾아냈다. 또 연구팀은 NGF가 종간 장벽을 뛰어넘어 배란을 유도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수퇘지나 토끼, 말의 정액이 암컷 라마의 배란을 유도하고, 수컷 라마의 정액은 사춘기 이전 마우스에게서 배란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

단, NGF는 연구진이 연구한 자발적 배란자인 암소의 배란을 유도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NGF가 암소의 난포 발육 타이밍을 변화시키고 황체의 발육과 기능을 촉진하는 등 다른 임신 촉진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덤스 박사팀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OIF가 인간의 임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기획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액 속의 OIF 농도가 높은 남성의 경우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생식능력이 더 뛰어나는 등 OIF와 불임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될 경우 OIF를 이용한 불임치료법이 개발될 수도 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2-08-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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