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寄生)으로 생존하는 대표적 생물로는 뻐꾸기를 꼽을 수 있다. 뱁새의 둥지에 알을 낳은 다음, 뱁새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뱁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뻐꾸기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둥지에 있는 알의 수가 자신이 낳은 것보다 많으면 뻐꾸기가 몰래 알을 가져다 놓은 것을 눈치채고 둥지 밖으로 뻐꾸기의 알을 밀어 버린다.
이때 뻐꾸기는 새로운 위장전술을 펼친다. 둥지에 있는 알의 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알을 가져다 놓은 뒤 바로 뱁새의 알을 해당 개수만큼 내다버리는 것. 숫자만 맞으면 되는 뱁새는 뻐꾸기의 전술에 속은 것도 모르고 모든 새끼들을 헌신적으로 키운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새끼보다 먼저 부화하고 덩치도 더 크다. 따라서 뱁새 어미가 자리를 비우면 나머지 뱁새 알들이나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 다음 자신이 모든 것을 독차지한다.
이 같은 교묘하면서도 잔인한 생존 전략 때문에 사람들은 뻐꾸기를 ‘기생생물의 끝판왕’으로도 부르는데, 최근 들어 이런 뻐꾸기를 능가하는 기생생물이 등장하여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생물은 바로 ‘새삼(dodder)’이라는 이름의 덩굴식물이다. (관련 기사 링크)
숙주의 유전자 훔쳐 자신의 진화에 도움 줘
새삼은 새삼과(cuscutaceae)의 유일한 속인 새삼속(cuscuta)을 구성하는 식물이다. 새삼속에는 잎이 없는 대신에 다른 식물의 줄기를 감으면서 자라는 150여 종의 덩굴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기생식물답게 새삼은 흙에 뿌리를 내려 자라는 것이 아니라, 줄기를 뻗어서 숙주로 삼을 식물을 찾으며 자란다. 그렇게 줄기를 뻗치다가 숙주로 삼을 식물을 찾게 되면, 그 식물에 뿌리를 내린 다음 숙주로부터 양분을 빨아먹으며 생존해 나간다.
새삼의 독특한 특징은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꽃까지 피는 엄연한 식물이지만, 광합성으로 영양분을 만드는 대신 숙주 식물로부터 영양분을 빼앗아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새삼을 연구하던 미국의 과학자들은 더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새삼이 숙주 식물로부터 빼앗는 것들 중에는 영양분 외에도 유전자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와 버지니아공대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공동 연구진은 수십개의 새삼들을 분석한 결과, 100여 개나 되는 숙주 식물의 유전자를 찾아냈다고 최근 밝혔다.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클로드 드팜필리스(Claude dePamphilis)’ 교수는 “새삼이 기생하는 덩굴식물의 대표적 모델이 된 데에는 숙주 식물의 유전자를 빼앗는 능력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하며 “이는 미생물들에서나 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라고 평가했다.
드팜필리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새삼의 이 같은 능력은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 현상과 관련이 있다.
‘수평적 유전자 이동’이란 생식에 의하지 않고 개체에서 개체로 유전형질이 이동되는 유전학적 현상을 말한다. 유전자의 수직 이동은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일어나지만, 수평이동은 두개의 다른 유기체 사이에서 유전자가 이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수평적 유전자 이동 현상은 주로 단세포 생물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가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교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유전자 수평이동 방식이다.
이에 대해 드팜필리스 교수는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생물에서는 다른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받아들이는 수평적 유전자 이동이 흔하게 일어나지만, 고등 생물에 속하는 식물에서는 상당히 드문 현상”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새삼은 108개의 유전자를 숙주 식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중 18개는 공통적으로 다른 새삼 들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새삼의 오랜 조상 식물이 훔친 18개의 유전자가 이 기생 식물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숙주의 방어 체계 무력화 용도로 유전자 사용
새삼 같이 숙주 식물로부터 유전자를 훔치는 식물로는 고약한 냄새와 거대한 꽃잎으로 유명한 ‘라플레시아(Rafflesia)’가 있다. 동남아가 원산지인 이 식물은 숙주가 되는 식물인 ‘테트라스티그마(Tetrastigma rafflesiae)’로부터 유전자를 훔쳐 자신의 대사 활동에 도움을 주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라플레시아를 연구해 왔던 미 하버드대의 연구진은 라플레시아와 테트라스티그마 사이에서도 ‘수평적 유전자 이동’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라플레시아의 전사체(transcriptome)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의 2%에 해당하는 49개가 숙주 식물인 테트라스티그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연구 책임자인 하버드대의 ‘찰스 데이비스(Charles Davis)’ 교수는 “라플레시아가 숙주 식물의 유전자를 상당히 오래전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라고 추정하며 “과거에는 그 속도가 천천히 진행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숙주 식물의 유전자를 가져오는 속도가 빨라진 이유에 대해 데이비스 교수는 “기생 식물이 숙주 생물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먹는 능력을 강화시키려 했다든지, 아니면 숙주 식물의 방어 체계를 회피하여 안전하게 유전자를 가져오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주장했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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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9-08-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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