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 발병하면 이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한다. 오랜 연구 끝에 신약이 개발되면 제약사들은 신약판매를 통해 연구개발비를 비롯한 투자비용 회수와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인류의 적인 바이러스를 정복하기 위한 과학자, 제약사의 이 같은 노력은 그동안 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제약도 하나의 산업이고 기업은 수익을 내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신약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 간의 이른바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s)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해상충은 여러 가지 이해가 얽힌 상황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동등하고 공정하게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일컫는다. 신약을 둘러싼 경우 대중의 이익과 제약사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신종플루 제약사에 이익 줬다는 의혹 제기
‘WHO(세계보건기구)의 신종플루 대유행 준비지침이 제약회사에 이익을 줬다’는 의혹으로 불거진 이른바 ‘신종플루 음모론’은 ‘이해상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신종플루(H1N1)는 A형 독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생긴 새로운 바이러스로, 2009년 전 세계적으로 사람에게 감염을 일으키고 있는 호흡기 질환이다. WHO 최근 집계에 따르면 작년 4월부터 지난달 27일까지 전세계에서 신종플루로 사망한 사람은 총 1만8천239명에 달한다.
지난달 초 영국의학저널과 비영리조사단체인 언론조사국은 공동조사를 통해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WHO의 신종플루 준비지침 작성에 참여한 과학자 세 명이 대형 제약사들로부터 과거에 돈을 받은 적이 있고, 신종플루 대유행을 결정한 WHO의 16인 비상위원회 위원 중에서도 제약사로부터 돈을 받은 사례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에 마거릿 찬 WHO 사무총장은 곧바로 BMJ에 공개서한을 보내 “완벽하게 해명하건대, 나의 의사결정에는 어떤 시간, 단 1초라도 상업적 이해가 개입되지 않았다”며 제약업계 결탁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신종플루 대유행 선언에 결정적 조언을 한 전문가 비상위원회의 존 매켄지 위원장과 토니 에번스 위원 등 2명이 지난달 22일 사퇴함으로써 의혹은 더 확산됐다.
앞서 1월 유럽위원회 의원총회는 “제약회사들이 독감에 대한 자사의 특허 약품과 백신을 판촉하기 위해 공중보건을 담당하는 과학자들이나 관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보건위원회 회장인 보다그 박사는 총회 의제 제기에서 “WHO의 독감에 대한 ‘허위 대유행’ 캠페인은 금세기 최대 의학 비리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대유행 정의는 의약품 판매자의 영향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허위 대유행 캠페인은 과학적인 증거가 결여됐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5월 멕시코시에서 수백 건의 정상 독감 사례를 생명을 위협하는 새로운 대유행의 시작이라고 선언했다”고 말했다.
보다그 박사에 따르면, WHO는 거대 제약회사들과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대유행의 정의를 새로 설정해 기존의 정의인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감염되거나 사망”이라는 정의를 삭제하고 단순히 “바이러스로 국경을 넘어 전파되고 면역이 안 된 사람에게 전염”이라는 문구를 대신 대체해 정의했다.
대유행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대부분 국가의 정치가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이에 대한 추가 및 신규 백신에 대해 판매를 약속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WHO 비상위원회는 지난달 회의를 갖고 만장일치로 H1N1 독감 대유행이 아직도 제6단계인 최고 비상 단계 수준에 남아있다고 발표했다. 찬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가장 심한 대유행 기간이 세계 여러 곳에서 지나간 것처럼 보이나 대유행은 기타 지역과 취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 상업화, 기업과 과학자의 불편한 관계 조장
WHO가 신종플루 대유행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를 둘러싼 과학계의 논박은 곱씹어볼 일이다.
‘부정한 동맹, 대학 과학의 상업화는 과학의 공익성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의 저자 셸던 크림스키 터프츠 의과대 교수는 기업의 후원으로 수행되는 연구가 기업의 이해관계에 의해 충분히 좌지우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크림스키 교수는 1970년대 후반 재조합 DNA논쟁에 적극 참여한 이후, 과학기술과 사회, 기술위험, 과학 상업화, 생명공학의 사회적 문제 등을 주제로 많은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크림스키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MIT 생물학과 교수의 31%가 생명공학 기업과 공식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기업과 금전 관계로 얽혀진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교수 숫자도 10년 새 3배나 증가했다.
교수들은 자신의 연구와 관련된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에 자문하거나 주식을 소유한다. 또한 자신의 연구와 관련된 특허를 소유한다. 이들 대학의 과학자들은 제약사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보수를 받으면서 대필 논문으로 해당 업체의 상품을 선전하기까지 한다.
크림스키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과학자들이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나 결과가 편향되기도 하며, 그 결과 대중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이른바 ‘이해상충’이다.
단적인 예로 종약학 약품의 비용 효과를 분석한 의학 논문을 살펴본 결과, 제약회사가 후원한 연구는 비영리기관이 지원한 연구에 비해 약품의 비용 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1/8에 불과한 반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가능성은 1.4배나 높았다.
140여 개 과학잡지 가운데 이해상충 관련 지침을 채택하고 있는 잡지는 16%에 불과하고 6만 편의 논문 가운데 0.5%만이 저자의 이해관계 기록을 싣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까운 현실은 학술 잡지가 이해상충 기준을 강화하면 실제로 논문을 투고할 수 있는 저자가 거의 없을 만큼 이해상충이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음모론이 현실화된다면?
만약 과학자들과 제약회사 그리고 정부기관이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조작을 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물론 현실에서 이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 우울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에서 전도유망한 영국의 젊은 정치인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이러스 유행을 조작한다. 즉 바이러스를 살포,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아 영국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다. 하지만 이 정치인은 미리 개발한 백신을 이용해 공포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백신 약을 판매한다. 결국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최고수상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과학을 둘러싼 ‘음모론’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된다. 이에 더이상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한 외부 전문가위원회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WHO의 신종플루 음모론과 관련해 의혹과 문제점을 점검하는 외부 전문가위원회(위원장 하비 파인버그 미국 국립의학연구소 소장)는 신종플루 대유행 선언 과정, 제약업계와 WHO 비상위원회 소속 과학자들과의 결탁설 등을 조사 중이며, 내년 1월 집행이사회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 중이다.
- 이성규 객원기자
- henry95@daum.net
- 저작권자 2010-07-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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