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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임동욱 객원기자
2013-10-16

‘오픈 액세스 학술지’ 문제 드러나 가짜 논문 승인한 경우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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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액세스(open access)’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는 연구자들에게 빨간색 신호등이 켜졌다. 허술한 가짜 논문을 만들어 가명으로 투고하는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 상당수가 학술지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 학술지 '사이언스'는 피어리뷰를 생략하는 오픈 액세스 학술지의 저품질 문제를 특별 기사를 통해 고발했다. ⓒScience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의 존 보허넌(John Bohanon) 과학전문기자는 “이끼류에서 추출한 물질이 담긴 시험관에서는 암세포 증식의 속도가 저하됐다”는 내용의 가짜 논문을 만들어 최근 10개월 동안 전 세계 304개의 오픈액세스 학술지에 투고했고 255개 학술지에게서 답신을 받았다.

논문에 담긴 내용은 기본적인 논리와 데이터가 엉망이었음에도 157개 학술지에서 게재 허가 통보를 보내왔다. 거절한 학술지는 98개에 불과했다. 피어리뷰(peer-review) 즉 동일 분야 연구자가 검증을 진행하는 ‘동료 심사’를 실시하는 학술지의 비율도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수 학술지가 주소와 연락처도 불투명했다. 소재지가 미국으로 되어 있는 학술지들도 편집장의 이메일에 담긴 인터넷 IP 주소를 추적하자 주로 개발도상국에 위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한 경우에는 편집자나 심사자가 신원 미상인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논문 저자들로부터 게재 비용을 반강제적으로 징수한다는 점이다. 홈페이지에는 게재 비용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가 막상 논문이 통과되면 그제서야 “논문을 싣고 싶으면 150달러를 입금하라”는 식이다. 논문 실적에 목마른 신진연구자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사이언스지는 이번 조사의 자세한 전말을 온라인 서비스에 게재하며 자격 미달 학술지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논문 일단 승인해주고 게재 비용 요구하는 학술지

2012년 7월, 사이언스지에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데이비드 루스(David Roos) 펜실베니아대 생물학 교수가 오픈 액세스 학술지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법정전염병인 웨스트나일열을 퍼뜨리는 모기를 함께 조사하던 알린 누차(Aline Noutcha) 나이지리아 포트하커트대학교 생물학 교수는 연구결과를 ‘공중보건연구(Public Health Research)’에 투고했다. 사이언티픽 앤드 아카데믹 퍼블리싱(SAP)이라는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오픈 액세스 학술지였다.

홈페이지 어디에도 투고 비용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해당 출판사가 운영하는 다른 학술지도 무료로 논문을 실어주기 때문에 누차 교수는 안심하고 논문을 보냈다. 그러나 게재 승인과 함께 “150달러의 별도 게재료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개발도상국 나이지리아의 연구자이므로 특별히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을 제시한다는 설명도 붙었다. 해외이체는 복잡한 데다 수수료도 비싸고 신용카드도 없던 터라 미국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해 간신히 입금을 하고 나서야 논문을 출간할 수 있었다.

루스 교수는 “요즘 오픈 액세스 저널은 과학 연구자 공동체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이 트렌드”라고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메일은 존 보허넌 과학전문기자에게 전달되었고 즉각 조사가 시작되었다.

SAP라는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보니 200개에 육박하는 소속 학술지 명단이 있었다. 그중에서 ‘미국 고분자과학 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Polymer Science)’의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피어리뷰를 통해 고분자의 특질과 함유물질에 대한 국제적 기초연구를 확산하기 위한 지속적인 포럼”이라는 소개가 보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1946년 와일리(Wiley)에서 창간한 학술지 ‘고분자과학 저널(Journal of Polymer Science)’의 소개를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미국 학술지인지도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도 없었다. 안내된 주소를 조사하자 LA 인근 고속도로 교차로 어디쯤에 있는 황무지로 밝혀졌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편집자와 심사위원진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대부분 답신이 없었다.

연락이 닿은 심사위원 중에는 이탈리아 나폴리에 위치한 화학 및 고분자 기술 연구소(ICTMP)의 마리아 라이모(Maria Raimo) 연구원도 있었다. 라이모 연구원은 몇 달 전에 심사위원으로 초빙한다는 메일을 받았지만 내용이 허술해서 “누군가의 장난이겠거니” 하고 거절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데이비드 토머스(David Thomas)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편집장으로 정식 학술지가 출간되었다. 라이모 연구원은 자신의 이름을 심사위원 명단에서 빼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학술지 홈페이지에 심사위원으로 명시되어 있다.

보허넌 기자는 몇 달 동안 SAP의 편집진에게 연락을 취해서 결국 답신을 받아냈다. 찰스 듀크(Charles Duke)라는 사람이 “SAP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학술 전문 출판사”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는데 영어 수준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메일을 발송한 시간도 새벽이었다. 발신지가 미국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보허넌 기자는 저자의 이름도, 소속기관의 명칭도, 연구결과도 모두 가짜인 허술한 논문을 만들어 투고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 오픈 액세스 학술지의 수준을 가늠해보기로 결정했다.

오픈 액세스 학술지 중 60퍼센트 이상이 가짜 논문 승인

논문에 쓰일 가짜 이름은 ‘오코라푸 코바뉴 (Ocorrafoo Cobagne)’, 소속은 ‘와시(Wassee) 의학연구소’, 소재지는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에리트레이아의 수도 ‘아스마라’, 내용은 ‘이끼에서 추출한 물질이 암세포의 증식 속도를 낮춘다’는 것으로 정했다.

▲ 논문 실적이 필요한 신진 연구자들을 먹잇감 삼아 저품질의 학술지들이 포식자 노릇을 하고 있다. ⓒWikipedia
논문에 담긴 내용도 일부러 허술하게 지어냈다. 고등학교 화학 교육을 배운 사람 중 기초적인 데이터 플롯(data plot)을 읽을 수 있는 수준만 되어도 당연히 반려시킬 만큼 실험 결과를 과장해서 적어넣었다.

보허넌 기자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10개월 동안 모두 304가지 버전의 가짜 논문을 찍어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255개 오픈 액세스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런데 지난 7월 초 ‘천연약물 제약회사 저널(Journal of Natural Pharmaceuticals)’이라는 학술지에서 게재 승인 통보가 왔다.

이 학술지는 홈페이지에 “바람직한 약학 관련 활동으로 생산된 천연 약물 분야에서 고품질 연구논문과 리뷰를 교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피어리뷰 학술지”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편집자와 이사진에는 각국 대학의 약학 분야 교수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고품질의 피어리뷰 학술지를 표방하면서 허술한 가짜 논문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이 학술지는 인도 뭄바이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오픈 액세스 학술지 전문 출판사인 메드노(Medknow) 소속이다. 메드노의 홈페이지에는 각국의 연구자들이 매달 2백만 편의 학술 논문을 이용하고 있다는 홍보문구도 있었다.

메드노는 지난 2011년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연간 매출액 50억 달러 규모의 다국적 기업 볼터스 클루버(Wolters Kluwer)에 매각되었다. 이런 식으로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오픈 액세스 학술지들이 다국적 기업에 흡수되었다. 가입이나 구독을 통해 회원제로 운영되던 방식도 논문 저자들이 게재 비용을 직접 지불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논문 심사나 게재 시스템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보허넌 기자의 가짜 논문 투고에 답신을 보내온 255곳의 오픈 액세스 학술지 중 157곳에서 논문의 게재를 승인했다. 피어리뷰를 통해 내용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게재를 거절한 학술지는 98개로 전체의 4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피어리뷰를 실시한 106개 학술지 중에서 게재를 승인한 경우도 70퍼센트에 달했다.

투고 2주만에 윤리적인 문제까지 지적하며 게재 불가 판정을 내린 유일한 오픈 액세스 학술지는 국제 SCI급 학술지인 ‘(PLoS ONE)‘뿐이었다.

게다가 논문 게재 비용을 입금하는 계좌 중 상당수가 공지된 주소와 달랐다.사이언스지가 인터넷 IP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에서도 편집자들의 이메일 발신지가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것으로 밝혀졌다.

오픈 액세스 학술지를 관리하는 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전 세계 오픈 액세스 학술지 목록을 서비스하는 DOAJ 서비스 창립자인 라르스 뵤른스하우게(Lars Bjørnshauge) 스웨덴 룬드대학교 교수는 “전체의 45퍼센트만이 피어리뷰를 진행했다”며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오픈 액세스 학술지 협회인 OASPA의 폴 피터스(Paul Peters) 회장은 “이번에 발견된 문제 학술지는 협회 탈퇴 결정을 통보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가짜 논문 소동의 과학적 검증 방법에 이의를 제기했다. “구독 기반 학술지와 오픈 액세스 학술지 중 무작위로 여러 곳을 선정해 대조군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논문 실적에 의해 고용과 연구비 지원 여부가 좌우되는 신진 연구자들은 누구에게나 연구결과 게재의 기회를 제공하는 오픈 액세스 학술지에 끌릴 수밖에 없다. 일부 정체불명의 저품질 학술지들은 이들을 먹잇감 삼아 돈을 뜯어내는 ‘포식자’로 살아간다. 이에 각국에서는 오픈 액세스 학술지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임동욱 객원기자
im.dong.uk@gmail.com
저작권자 2013-10-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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